'중국이나 대만으로 가면 연봉 1억5천만원은 보장받는다.거기서 잘하면 미국이나 유럽의 첨단기업으로 옮길 수도 있다.' 국내 전자업계의 촉망받는 엔지니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런 제의를 직·간접적으로 받는다고 한다. 30대 초·중반에,기껏해야 연봉 4천만∼5천만원의 과장급 연구원들에겐 꿈같은 얘기다. 하지만 이런 제안에는 대개 조건이 붙어있다. 빈 손으로 와서는 안된다는 것. 중국이나 대만 업계는 높은 연봉을 지급하는 대가로 '기술이전'을 요구하는 게 상례다. 전 직장에서 습득한 기술로 사실상 '산업스파이' 역할을 해달라는 주문이나 다름없다. 지난 3월 국내 LCD(액정표시장치)업체에 근무하는 D사의 연구원 2명도 이런 제안을 받았다. 브로커는 같은 D사 직원 출신으로 중국 T사의 한국대리점 대표를 맡고 있던 K씨. K씨는 후배인 이들 연구원에게 "휴대폰용 컬러 모듈 기술을 넘겨주면 중국 T사로 스카우트해 부장급 대우와 함께 1억5천만원의 연봉을 주겠다"고 권유했다. 연구원들은 손쉽게 이를 수락,D사가 60억원을 들여 개발한 기술도면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T사는 이 기술을 받아 6개월 내 컬러 LCD제품을 생산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지난 5월 관련자들이 검찰에 긴급체포되지 않았더라면 중국으로의 수출 꿈에 부풀어있던 D사로서는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국가정보원에 검거된 국책연구소 연구원들의 IMT-2000 기술유출 사건도 비슷한 경로로 이뤄졌다. 연구원 김 모씨 등 4명은 해외 Q사로부터 전직 제안을 받고 무려 1천5백건의 기술자료를 개인 컴퓨터로 다운받았다. 하지만 Q사와 연봉 협상이 당초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자 국내 휴대폰업체로부터 소스코드 등을 받아 CDMA 휴대폰을 직접 개발하기로 했다. 이들 연구원은 이 휴대폰 기술을 또 다른 해외 휴대폰 제조업체인 N사에 제공하려다 지난 4월 국정원에 적발됐다. 국정원 관계자는 "그동안 국내에서 발생한 산업스파이 단일 사건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인 6조1천억원의 매출 손실을 안겨다줄 뻔한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이들 사례에서 나타났듯이 회사의 핵심연구원이 산업기밀 유출에 가담할 경우 그 파장은 대단히 치명적일 가능성이 높다. 대기업들이야 핵심 연구인력들에 대한 처우나 관리시스템이 좋다. 하지만 신생 벤처기업이나 중소기업들의 사정은 그렇지 못해 관련자들이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 문서유출방지시스템 전문업체인 가드쉘의 조성호 사장은 "전자문서를 관리하는 업종에 종사하면서 내부 스파이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를 실감하고 있다"며 "양질의 보안시스템을 구축하면서 효율적인 인력관리·육성방안을 병행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