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11월 30일 이라크에서 한국인 첫 희생자가 발생했다. 또 일본인 외교관 2명을 비롯 스페인 미군 장교와 민간인 등 총 15명이 지난주 말 이라크에서 사망했다. 미군 희생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 5월 1일 주요 전투를 종결한 미국의 승전(勝戰)이 무의미함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미국은 이라크사태를 속전속결로 해결하기 위해 '선 공격,후 해결'이라는 방식을 채택한 것 같으나 판단 착오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개전초 이라크에서 미군을 환영하리라던 기대는 무너지고 오히려 반미감정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미국에 협력하는 국가들에 대해서도 경고 메시지는 계속 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은 테러와의 전쟁을 종식시키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이라크식 테러로 변모하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전투병이건 비전투병이건 이라크인들의 눈에는 점령군일 뿐이다. 이라크인들은 '당근과 채찍'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전 이후 잘 지켜보아 왔다.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라크와는 적이 되는 수밖에 없다. 파병을 결정한 이상 테러에 대비해야 한다. 이제 한국은 이라크 현지에서는 물론 국내 및 해외에서 테러의 위협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라크는 수많은 족장들이 이끄는 아주 복잡한 모자이크 사회다. 개전 직후 사담 후세인은 마치 철저한 준비라도 한 듯 텔레비전에 나와 "지금부터 각 부족장들은 알아서 전투에 임하라"고 포고한 뒤 막후로 사라졌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골격은 이라크를 지켜 달라는 주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사담 후세인을 옹호하며 이라크 정권이 철권정치로 이라크를 통치하던 시절 각 족장들은 이를 떠받치는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들 지렛대가 이제 지하에서 각자 자기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요,그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반미감정을 이용한 외국인의 퇴출이며,그 결과가 현재의 테러 사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인들은 비록 가난하게 살아왔지만 그들에게는 문명국가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을 배경으로 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메소포타미아 문명,바빌론 문명과 세계 최초의 법전인 함무라비 법전을 가진 민족,그리고 세계 제2의 석유 매장량….비록 지금은 미국이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이기는 하지만,이라크인들의 눈에는 긴 역사에서 겨우 한 순간을 차지하는 일시적 현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라크는 이라크인들의 것'이라는 명제(命題)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항하는 것이며,그 수단이 '테러'라는 형태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이제껏 테러문제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월드컵도 올림픽도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잘 치러냈다. 그런 평화스러운 나라가 이제 테러와의 전쟁 속 한가운데 선 것이다. 이라크 파병은 월남 파병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월남 파병은 반공이라는 분명한 명분이 있었지만,이라크 파병은 모호한 '테러와의 전쟁'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도와주기 위해 떠나는 한국은 분명히 크게 보아서는 세계평화에 대한,작게 보아서는 미국에 대한 지원자다. 그렇기에 설사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우리는 미국에 대해 테러방지 비용 내지 한국인에 대한 해외에서의 안전보장을 요구해야 한다. 정부의 책임도 더 무거워졌다. 이라크는 아랍국가이고 이슬람국가다. 비록 아랍권과 이슬람권이 분열양상을 보이고는 있지만,그들은 아랍이요 중동국가들이며 분명한 무슬림 형제국가들이다. 그들은 어려우면 언제든지 응집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정부는 이라크 한 국가에 대한 생각으로 이번 전쟁에 임해서는 안 된다. 석유자원의 보고(寶庫)인 중동! 2억의 무슬림이 존재하는 거대한 시장으로서 중동에 대한 큰 틀에서 정부의 능률적인 외교적 수완이 요구되는 시기다. hong@hopi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