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대선자금 수사의 과녁을 대기업 총수에게까지 겨누는 검찰의 모습은 한 TV드라마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해방전후 '건달'들의 세계를 그린 이 드라마에서 주먹패들은 종로 동대문 서대문 등 주요 시장의 상인들로부터 정기적으로 '세금'을 걷는다. 이들이 상인들에게서 울궈내는 돈을 굳이 '세금'이라고 부른 대목이 흥미롭다. 자신들의 조직을 유지하고 활동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돈이 지속적으로 필요한데,그 돈을 시장상인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걷는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의 주먹패를 정치권,시장 상인들을 기업인으로 대입하면 요즘 한국의 정치판과 재계를 뒤흔들고 있는 '2003년 정치자금 실화(實話)극장'을 보다 잘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시장상인이 주먹패에게 낸 '세금'이나 기업인이 정치인에게 제공하는 '정치자금'이나 법적인 강제성은 없지만,그렇다고 해서 내지 않을 도리가 없는 '현실의 법'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정말로 닮은 꼴이다. 법보다 가까운 게 '주먹'이고,정치인들의 '힘'이다. 만약 검찰이 시장상인들을 소환해서 "어째서 당신들은 건달들에게 불법적으로 자금을 줘왔느냐"고 추궁했다면 상인들은 뭐라고 대답했을까. "생돈을 내고 싶어서 냈겠는가. 건달들의 불법적인 자금요구 행위를 방치해온 당신들이야말로 심판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왜 피해자인 우리를 닦달하는가" 하며 펄쩍 뛰지나 않았을지 모르겠다. 정치권에 선거자금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줄줄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대기업들이 "돈주고 뺨맞는 기막힌 일"이라며 황당해하고 있는 것도 다를 게 없다. 물론 일부 중소기업인이 청와대 실세 등 정치권에 자금을 주면서 반대급부를 받는 '거래'를 했다는 의혹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소액주주와 시민단체,전체 지분의 절반을 넘나드는 외국인투자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요즘 알만한 대기업들이 잔가지 이권을 챙기자고 정치자금을 건네주었을까. 대통령도 인정했듯이,누가 정권을 잡든 '나쁘게만 하지 말아달라'는 의미의 보험성 정치자금이었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기업들이 분식회계 등 온당치 않은 방법으로 그 돈을 마련했다면 그에 대해서는 사실 규명과 응분의 조치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번 정치자금 수사의 본질일 수는 없다. 정치가 존재하는 한 정치자금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정치자금은 민주주의의 비용(cost of democracy)이자 '정치의 모유(mother's milk of politics)'로 불리기도 한다. 필요악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한국의 정치비용은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왔다는 점이다. 작년 대통령 선거만 해도 여야 각당은 법정 한도인 4백억원 이내의 선거자금을 조달해 지출했다고 신고했지만,지금까지의 검찰수사만으로도 그보다 몇 배는 넘는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런 어마어마한 뒷돈을 대주기 위해 기업들이 이익누락 등 회계분식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것은 한국 정부와 정치권이 먼저 부끄러워하고 재발 방지를 다짐해야 할 일이다. 고비용·저효율을 넘어 경제 전체를 무력화시키기에 이른 '불임(不姙)정치'를 개혁하자는 검찰 수사가 본말을 전도시켜서는 안된다. 후진적 약탈형 정치(kleptocracy)의 희생자인 대기업 총수와 전문경영인들부터 줄줄이 출국금지 조치당하는 현실과,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에서 기업 못해먹겠다'며 중국 등으로의 해외이전을 위해 보따리를 싸는 수많은 기업인들의 모습이 엇갈린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