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建榮 < 단국대 교수·전 교통개발연구원장 > 일본의 고속철도 건설은 패전의 밑바닥에 빠져 있던 일본의 자존심을 세우고 일본을 선진국의 반열에 올려 놓은 국책사업이다. 요시로 이카리가 쓴 '고속철도로 가는 길'을 보면,신념에 찬 지도자들이 앞장서 여러 갈래의 국론을 결집시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모습이 소설처럼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은 도쿄-오사카 간의 신칸센을 건설하는 데 5년 반 걸렸다. 그런데 경부고속철도는 착공한지 벌써 11년째다. 정부 계획 상으로는 총 사업비가 18조 4천억원,2010년까지 완공한다고 하나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고속철도 건설사업은 그동안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서너 차례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사상 최대의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기술과 경험부족에서 오는 난관도 많았다. 예기치 못했던 폐갱도나 문화재의 출현으로 노선이 바뀌기도 하고, 교량형식도 수정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장애물은 지역이기와 관련 집단들의 저항,그리고 이들과 야합한 정치적 압력이었다. 노선을 놓고, 역 위치를 놓고, 보는 각도나 이해에 따라 끊임없이 민원을 제기하고 저항하여 왔던 것이다. 어차피 국토를 가로지르는 국책사업은 모든 국민,모든 지역을 고르게 만족시킬 수 있는 대안은 없다. 얻는 자가 있고, 잃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국익이란 관점에서 합리적인 결정이 내려지면 이를 수용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금정산,천성산터널 구간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7개월간 공사가 중지되었다가 재검토 끝에 원안대로 확정된 것이 바로 얼마 전이다. 이로 인한 시간적 금전적 손실이 얼마인가. 최근에는 다시 대통령이 울산역을 추가하자는 제안(?)을 하고,건설교통부는 울산역을 포함하여 평택,오송,김천역 추가를 검토하겠다고 맞장구를 치고 있다. 총선이 내년으로 다가옴에 따라 해당 주민들의 표를 계산한 고도의 정치적 행위인 듯하다. 그렇다면 고속철도 노선이 다시 백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고,이로 인해 또 공사가 중지되고 길고 지루한 논쟁의 늪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고속철도의 노선이나 역 위치는 어떻게 결정되었는가. 이는 10여년에 걸쳐 수없이 많은 노선과 역 대안을 놓고,교통수요,주변 환경과 역세권,도시구조와 교통체계,그리고 대안에 대한 경제성,환경영향,교통영향 등을 분석하여 최적화방안을 찾은 것이다. 경주역은 주변의 울산,포항,영천 등을 배후지로 판단하여 선택된 것이다. 연구 과정상의 중대한 오류가 발견되었다면 마땅히 수정해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선 고속철도가 달려야 하지 않겠는가. 역을 추가하려면 노선도 바뀔 수밖에 없다. 다시 공사기간이 늘고,비용만도 수천억원이 소요될 것이다. 일본에서도 주민 요구에 따라 고속철도 역이 추가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일본은 역 신설을 전제로 노선을 결정하였고,철도가 완공되고 상당 기간이 지난 후 상황변화에 따라 추가하였다. 이런 식으로 가면 고속철도가 산으로 가지 않을까. 현재 대전과 대구에서는 역을 지상에 만드느냐,지하에 건설하느냐를 놓고 '10년 전쟁'을 치르고 있다. 뿐인가. 서울 역시 중앙역을 서울역에 놓느냐 용산역으로 하느냐를 놓고 10여년간 다투다가 결국 출발역이 서울역,용산역,광명역으로 3분되었다. 답답한 일이다. 국책사업 추진에 단단히 고장이 난 것이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공사는 20개월째 사패산터널 앞에서 멈춰 있다. 정책 결정의 가장 큰 함정은 포퓰리즘이다. 참여정부는 글자 그대로 국민을 내세우며 '참여'란 이름의 지역주의 함정에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국책사업에 대한 경제성분석과 설계단계에 좀더 정성과 예산을 투입하여야 한다. 국책사업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삽질'부터 하거나 타당성분석이 사업합리화의 도구로 전락한 적도 없지 않다. 또한 설계단계에서 충분한 기술검토가 미흡하여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일도 잦았던 것이 사실이다. 판단은 신중하게 하되,결정된 사안은 과감하고 끊김없이 추진해야 한다. 정책결정자의 결단은 항상 고뇌에 찬 것이고 그래서 그는 고독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단과 추진은 선거와 역사가 평가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