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0년대 미국은 전례 없는 경제 활황을 경험했다. 그 원인에 관해 여러 가지 분석이 있지만, 80년대의 인수합병(M&A) 붐이 한 기초가 됐다는 점은 다들 수긍하고 있다. 기업들의 구조조정과 활발한 적대적 M&A로 인해 전문경영자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그 결과 미국 기업들은 튼튼한 체질을 가지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정보기술(IT) 붐이 가세했고 훌륭한 경제정책이 기업들을 지원했다. 그런데 좋은 일에는 항상 골칫거리가 따라오는 것이 세상사이다. 당시 M&A 시장에서는 악성 투기꾼들이 큰 몫을 챙겨가기도 했다. 소위 기업사냥(corporate raid)도 붐을 이루었던 것이다. 영화 '프리티 우먼'에서 리처드 기어가 연기하는 기업사냥꾼을 생각해 보면 된다. 이들에게는 경제의 효율성, 기업의 성장,노동자들의 고용안정 이런 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단기간에 큰 돈을 버는가가 유일한 목표이다. 이들 때문에 무수한 희생자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요즘 우리 경제 상황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다고는 하면서도 증권시장에서는 꼭 그렇지 만도 않은 것 같은 일들이 있어 사람들의 걱정을 낳고 있다. SK 현대엘리베이터,그리고 최근에는 삼성전자마저도 외국의 투기성 펀드들에 시달리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나온다. 네티즌들은 외국계 펀드, 특히 투기펀드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 펀드들이 우리의 우량기업들을 뒤흔든다 해서 열띤 정치적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80년대 미국에서 횡행했던 기업사냥을 걱정하는 것은 우리의 기업환경이나 사회적 규범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친 기우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글로벌시대에 살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따라서 우리 증시는 춤을 춘다. 그런데 단기수익을 지향하든, 투기목적으로 활동하든,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법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규제할 수도 없거니와 국제화된 시장에서는 그래서도 안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동북아 경제 중심국은 고사하고 국제사회에서 또 고립된다. 정공법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 즉 경영능력을 배양하고 지배구조를 개선해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투자자들의 이익을 배려하는 정책을 전개해서 주가를 높이는 방법이다. 기업의 경영과 활동이 윤리적이고 생산성이 높아 기업가치가 높아지면 그만큼 투자자 저변이 넓어져서 주가의 변동도 심하지 않게 되고 그러다 보면 투기세력들이 집적거릴 매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너무 교과서적인 이야기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보다 실제적인 제안을 하자면, 국제적인 펀드들 중에는 캘퍼스(CalPERS)니 허미스(Hermes)니 하는 장기투자 글로벌 펀드들이 있는데 이들은 앞에서 말한 좋은 요소들이 확인되는,말하자면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실무를 이행하는 기업들에만 투자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들이 투자할 여건을 마련해 투자자로 유치하면 어떨까? 초대형 장기투자 펀드가 유치되면 아마도 투기세력들은 해당 기업에서 얻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작은 투자자들도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그 성격상 경영권 인수에는 관심이 없고 단기 투기 수익을 노리지도 않는다. 즉 경영에 간섭은 하지만 외부에 대해서는 자기들이 신뢰하는 경영진을 보호해 주는 이른바 '백기사'의 속성도 가진다. 실적이 좋고 훌륭한 투자수익을 가져다 주는 경영자들에 대한 보상도 아주 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영자들에게 글로벌 시장에서 통용되는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가 어떤 것인지 한 수 가르쳐 주기도 할 것이다. 이를 두고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을 떠 올릴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자본의 국적에 따라 피아를 식별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필요할 때는 외국의 힘을 빌리고,마음에 안들 때는 외면하는 식으로 우리 시장을 운영할 수는 없다. 언제나 그렇지만 적은 항상 우리 안에 있다. 닫힌 마음과 닫힌 시각이 우리의 가장 큰 적이다. crwoo@wooyu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