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두드러진 언론과 정권의 갈등을 구경하면서 나는 5백년 전을 떠올린다. 그 때 이 땅의 임금은 연산군이었는데,그는 바로 언론을 둘러싼 싸움에서 패해 왕위에서 밀려났다. 나의 이런 주장은 이제 30년이나 돼 가는 내 박사학위 논문 주제의 하나여서,그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다. 연산군은 관상감(觀象監)을 혁파해 사력서(司曆署)로 낮췄다는 기록이 당시 '실록'에 적혀 있다. 관상감이란 오늘날의 국립천문대와 국립기상대를 합친 기구 정도다. 임금이 그런 자연과학 기관을 없애고 그 대신 시계와 달력을 담당하는 기관만 남겼다 하여 무슨 대단한 일이었을까 생각할 법도 하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는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의 하나라 할 수도 있다. 관상감이 없어진 것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고,연산군은 바로 그 사건 때문에 임금 자리에서 축출당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관상감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 그런 과학 기관이 아니라 언론기관이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원래 유교 사상의 핵심에 재이론(災異論)이 있다. 일식 혜성 가뭄 지진 등 이상한 자연 현상,즉 재이는 군주(君主)의 잘못에서 비롯하고, 무엇이 그런 자연의 괴리(乖離)를 만드는지 임금과 신하는 끊임없이 반성하여 나라를 잘 이끌도록 하라는 것이 천명(天命)이다. 신유학(新儒學)내지 주자학이 점점 뿌리내리고 있던 연산군 시대에 재이론은 지도층의 머리에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임금으로서는 재이론이란 여간 불만이 아니었다. 자연의 이상 현상이 생길 때마다 임금은 신하들에게 구언(求言)하게 마련이고,그럴 때마다 상소문이 쏟아져 올라왔다. 또 임금은 대궐을 피해 옆의 작은 궁궐에서 신하들을 만나고,음식도 간소하게 하고,술을 금하고 가무를 즐겨서도 안 된다. 두려워하고 스스로 반성하는 태도(恐懼修省)야말로 하늘을 감응시켜 음양을 순조롭게 되돌릴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자학은 가르쳤다. 재이론은 임금에게는 무서운 독약일 뿐이었다.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18살에 임금 자리에 오른 연산군은 3년 쯤 뒤부터는 자신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대 청년 왕 연산군에게 무서운 것은 없어 보였을지도 모른다. 1498년의 무오사화와 1504년의 갑자사화를 통해 그는 수많은 사대부들을 처형했고,온갖 잔혹과 황음(荒淫)을 골라 한 것으로 역사는 전한다. 특히 그는 국립대학인 성균관을 놀이터로 삼고, 경연(經筵)을 폐지했으며,홍문관과 사간원을 없애 이미 언로(言路)를 막는 일에 나서고 있었다. 재이론도 그의 왕권강화의 길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관상감은 바로 이런 재이를 관측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는 기구였다. 재이의 관측 보고를 못마땅하게 여긴 연산군은 1505년(연산군 11) 금성이 낮에 나타나는 현상과 유성(별똥별)에 대해 보고하지 말라고 명했다. 그 후에도 이런 일은 거듭돼 재이가 한 가지씩 보고 대상으로부터 사라져 연산군 말년(1506)에는 자연재이는 그저 자연현상에 지나지 않게 바뀌고 있었다. 그런데 관상감이 그해 7월 20일 혜성의 출현에 대해 보고서를 올렸다. 연산군은 화가 났다. "아뢰지 말라고 하교하였는데 어찌 또 아뢰느냐? 천도(天道)는 아득하여 알기 어렵다. 옛날 요(堯)임금 때도 9년의 홍수가 있었고, 탕(湯)임금 때도 7년의 가뭄이 있었으니,어찌 요와 탕의 덕이 부족해서 그랬겠느냐.천수(天數)의 우연이지 인사(人事)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명했다. "관상감을 혁파하여 사력서로 낮추라고."그리고 꼭 42일 만인 9월 2일(기묘) 그는 왕위에서 쫓겨났고,두 달 뒤 죽었다. 말인즉 연산군이 옳다. 재이란 자연의 우연에서 일어날 따름이지,사람들의 잘잘못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연산군이 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었다. 하지만 합리와 과학도 그 시대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아마 상당수의 선비들도 이미 재이론의 비합리성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뜻하는 언로의 확보가 신하들에게는 절대로 더 중대했기 때문이다. 유학자들에게 언론은 바로 나라의 기강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