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0년대 말 경제위기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성장은 세계의 모델이었다. 제조업과 수출을 기반으로 한 우리 나라의 고성장 뒤에는 주력산업을 전략적으로 발전시켜야겠다는 정부의 산업정책과 세계를 상대로 위험감수(risk taking)를 한 기업들이 있었다. 그 결과 한국은 시대별로 경제환경의 변화에 적절한 주력산업을 전략적으로 발전시켜올 수 있었다. 산업기반이 부족했던 1960년대에는 저임을 바탕으로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집중 육성, 발전시켰다. 식품 합판 가발 등이 당시를 대표하는 주력산업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1970년대에는 자본 집약적 중화학 공업에 집중 투자해 공업화를 추진했다. 섬유 가전 철강이 이때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해외건설도 우리 경제에 적잖은 도움이 됐다. 80~90년대 중반까지 전자 자동차 조선 등 조립산업이 주요 수출산업으로 성장했다. 90년대 후반부터는 반도체와 더불어 휴대폰 등 일부 IT제품이 우리 경제를 견인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부터 세계 경제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주력 산업의 변화에 소홀히 해왔기 때문에 기존 산업의 한계가 노출되면서 경제 위기를 맞았다. 80~90년대 초반 일본의 경쟁력에 밀려 휘청대던 미국 경제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IT경쟁력으로 다시 세계 경제의 최강자로 부상하던 시기에 우리는 지난 수십년 쌓은 경쟁력을 한꺼번에 잃어버릴 위기에 빠졌던 것이다. 다행히 경제위기는 약이 됐다. 외부로부터 촉발된 것이긴 해도 구조조정이 이뤄졌고 많은 기업들이 사라진 반면 살아남은 기업들의 경쟁력은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삼성 LG 포스코를 필두로 한 우리 대기업들은 세계 1,2위 제품을 자랑하는 '파워 컴퍼니'로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됐다. 이제 남은 과제는 한국경제의 성장을 견인할 새로운 주력산업을 찾아 그 물결을 타는 일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해 발간한 '한국 주력 산업의 경쟁력 분석'에서 한국적 유망 산업으로 자동차 철강 반도체 가전 전자상거래 조선 석유화학 섬유 정보통신 콘텐츠 정밀화학 바이오 산업용기계 정밀부품 등을 꼽았다. 삼성은 우리 기업들이 이 분야에서 이미 경쟁력을 쌓아왔고 이들 업종이 국제시장 접근성이 높으며 파급 효과가 큰 산업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가운데 특히 반도체 조선 자동차 가전 석유화학 IT 나노 바이오 엔터테인먼트 등은 전략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실 새로운 주도산업은 어쩌면 우리가 상상도 못하고 있는 전혀 새로운 분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산과 유통이 있어야 하는 산업일진대 이전의 기반을 전혀 무시한 새로운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2000년대 들어 주력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는 반도체 이동통신 디지털가전 전자상거래 바이오 콘텐츠 정밀부품 등을 보면 기존 주도산업에서 '디지털' 색채가 더해진 특징이 있다. 기존 제조업을 디지털로 업그레이드할 때 주력산업 변화의 파도를 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업그레이드도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외부환경변화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추세를 예상하며 거기에 더해 과감하게 위험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디지털로 업그레이드 하자는 제안은 남보다 완전히 다른 무엇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한발짝 먼저' 나서자는 것이다. 초일류 기업들은 그런 변화를 주도한 회사다. 개척되지 않는 분야에 진출해 업계의 표준을 선도해 왔다. 윈도 운영체계시장의 마이크로소프트(MS)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이미 우리가 경쟁력을 갖춘 분야에서 세계 표준을 세워가는 일이 이제는 가능해져야 한다. 국내 업계가 주도해온 CDMA 시장에서 우리 업체들이 1,2위 휴대폰 생산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구조적인 우위다. 전문가들은 이밖에 끊임없는 혁신, 선택과 집중, 재무구조의 건전화, 미래에 대비한 연구개발(R&D) 투자, 인적 자산의 확충 등을 파워기업이 되는 조건으로 들고 있다. 기본적으로 수출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나라에서 세계 시장을 상대로 한 기업이 나오지 않으면 우리 경제엔 미래가 없다. 세계의 파워컴퍼니를 꿈꾸는 제조업 기반의 대기업들이 디지털로 무장할 때 한국경제는 새로운 고성장의 날개를 달 수 있다. 권영설 경영전문기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