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gitalav@digitalav.co.kr 내 고향은 시골이다. 아무리 미화하려고 해도 건덕지가 없는 척박하고 빈한한 곳이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고향은 아름답고 소중한 그 무엇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그저 빨리 잊고 싶은 곳이었다. 소년시절의 고향은 빨리 벗어나고 싶었고,그 곳의 사람과 사건 사물들은 나를 밀어내기만 했다. 반공투사였던 부친께서 인민재판에 처형되시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우리 가족에게는 유익한 것이 아니었다. 시대의 인심은 그랬다. 가장이 없는 과부와 3남매가 그 어렵던 60∼70년대를 이겨내며 생활하는 모습은 구구한 묘사가 없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기가 돼서 대학에 들어가고 군 복무를 필하고 난 이후 나는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국가유공자로 추서받은 부친의 묘소에 성묘하는 것조차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고향을 떠난 도시에서의 생활은 외길을 전력으로 달려가는 형국이었다. 그것은 삶의 노정이었고 내 영역을 갖고 싶은 본능적 행위이기도 했다. 결혼,어머니의 별세에 이어 나는 한가족의 가장이었고 사회인으로 입지하고 있었다. 그 시간들을 돌아보면 제법 이윽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때쯤부터였을까. 제법 안정된 생활의 틈새에 풀리지 않은 미진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가정 직장 종교 사회생활의 원만함 속에 손바닥의 티눈처럼 가시지 않은 미진함.실체 없이 감지되던 그 미진함이 드러난 것은 아득한 시간만에 찾은 고향에서였다. 도시의 사물들이 눈부실 속도로 변화하고 있었음에도,고향의 서정은 부끄럽지도 않은 듯 예전의 잔재들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 구태의연함을 만났을 때,실망이나 객쩍음과는 다른 청량스러운 충만함이 전신으로 번져 왔다. 마침 유월 초순이었다. 고목의 살구나무에는 잘 익은 살구가 매달려 있었다. 유년의 때에 허기지고 맹숭거리던 아이들의 표적이었던 살구는 손대는 이도 없는지 그득히 가지를 덮고 있었다. 그 농익은 살구열매와의 만남은 줄줄이 옛 일들을 엮어내었고,애써 외면하고자 했던 기억들이 그립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이후 나의 고향 찾는 행보가 잦아졌다. 그리고 어느 사람에게 고향은 집어던질 수 없는 소중한 곳이며,내게도 같은 경우인 것은 물론 윤기나고 촉촉한 감성으로 작용하는 것을 확인했다. 인생의 반을 달려온 그 질주의 중반,고향과의 재회가 이토록 소중한지를 알게 된 것은 인생의 유익함이 아니겠는가. 나는 벌써 휴가를 서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