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에서 명분과 현실이 판이할 수 있는 예로 즐겨 드는 것 중에 순결보험이 있다. 순결보험은 1960년대 중반에 이탈리아의 보험회사들이 내놓은 상품이다. 당시에 이탈리아에서는 해외유학붐이 일고 있었는데 유학 보낸 딸의 처녀성에 문제가 생길 경우 부모에게 보상해 주는 것이 순결보험이었다. 외국에 나가 있는 딸의 안위에 신경이 쓰이는 부모로서는 반색해 마지 않을 기발한 상품이다. 수요 있는 곳에 공급이 있다고 부모들의 잠재적 수요를 읽어낸 보험회사의 발빠른 대응이 돋보였었다. 결과는 어찌 됐을까? 몇 년 안돼 보험회사들이 엄청된 손실을 입고 순결보험상품을 없애 버렸다. 순결보험에 가입한 여자는 가입하지 않은 여자에 비해 믿는 구석이 있어 방종해지고 정조관념이 약해진다. 이것이 이른바 도덕적 해이이다. 도덕적 해이 때문에 보험회사가 예상하는 수준 이상으로 보험청구건수가 늘어나서 손실을 보게 마련이다. 손실을 메우기 위해 보험회사가 보험료를 올리면 될 것 아닌가? 보험료를 올리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상대적으로 정숙한 딸을 둔 부모는 보험을 들지 않고 방종한 딸을 둔 부모만 보험에 가입한다. 이것이 보험금을 탈 가능성이 큰 사람들만 보험에 가입하는 이른바 역선택이다. 이 역선택 때문에 보험료를 계속 올려도 보험회사의 손실이 메워지지 않는다. 보험회사가 순결보험을 없앨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필자가 보기에 참여정부가 표방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21세기판 순결보험이다. 먼저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 계층을 끌어안아 노사간의 세력균형을 꾀한다는 것은 얼마나 명분도 좋고 근로자 계층이 반색할 일인가? 그러나 노조가 법과 원칙을 어기더라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 사회통합적 노사관계의 기본정신인 이상 불법과 무원칙이 기승을 부리게 마련이다. 이는 부모가 순결보험에 든 것을 아는 딸이 더 쉽게 방종해지는 것과 같다. 다음으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계속 표방하면 이 틀에서 벗어나려는 기업들이 늘어난다. 외국인기업이 우리나라로부터 발길을 돌리고 우리 기업이 해외로 눈길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 그 예이다. 이는 순결보험이 지속됨에 따라 순결보험에서 떨어져 나가는 정숙한 딸과 그 부모가 늘어나는 것과 같다. 특히 역설적인 것은 사회통합적 노사관계가 말 그대로 사회통합적이지 않고 심지어 근로자통합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순결보험이 여성의 순결을 보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순결보험보다 폐해가 훨씬 크다. 순결보험의 경우에는 계속 보험을 들려는 사람들이 보험을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보험회사만 멍들 뿐이다.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목소리 큰 노조가 집단이기주의를 발휘하게 함으로써 비조직화된 대다수 근로자들의 처지를 곤고(困苦)하게 만든다.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의 증가,산업공동화의 촉진에 따른 실업 증가 등이 그 예이다. 결과적으로 몇몇 기업과 산업만 멍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경쟁력이 멍들고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이 떨어진다. 세계화 시대에 참여정부가 내세운 것과 같은 노사관계를 표방하는 나라는 다른 어디에도 없다. 노동부장관이 새삼 이런 노사관계를 들고 나온 것은 한총련이 북한정권의 주체사상을 학습하는 것 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다. 그런데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코드가 됐으니 시대와 역사적 경험을 외면하는 아마추어리즘의 백미로 비판받는 것이다. 방종한 여성들의 소망과는 달리 순결보험이 폐지됐다. 마찬가지로 노조의 소망과는 달리 허울좋은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도 빨리 폐지돼야 한다.정부 일각에서 거론된 대화와 타협을 기본으로 하는 네덜란드형 노사관계는 장기적으로 지향해 나갈 만한 이상적인 노사관계이다. 그러나 노사정위원회도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우리 현실에서 단기적으로는 공염불일 뿐이다. 뜨거운 가슴에 이끌려 또 다른 형태의 '순결보험'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벗어나야 할 것이다. 참여정부는 5년 임기 중에 실현가능한 일과 국제표준에 맞는 일에만 초점을 맞춰야 한다.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더라도 법과 원칙의 테두리 안에서 중시하는 것,무노동 무임금,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경영권 차원의 구조조정 인정,노사 쌍방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엄정한 규제 등이 정부가 초점을 맞춰야 할 노동관계 개혁과제이다. ksahn@c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