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엔터테인먼트에 근무하는 황기섭씨(30).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혼자 산 지 벌써 12년째다. 오랜 객지생활에 늘어난 것은 생활력과 멋부리기.혼자 살자니 번 돈을 아껴 써야 하고,엔터테인먼트쪽에서 일하다 보니 패션감각은 기본.장가를 일찍 가야 돈을 번다지만 아직 솔로가 좋다. 그러자면 돈을 아껴 멋을 부리는 방법밖에 없다. 사실 그는 직장에서,친구사이에서 '세일킬러'로 불린다. 세일 때 물건을 펑펑 사서가 아니다. 세일 때를 기다려 알뜰하게 필요한 것을 사는 데서 붙여진 별명이다. 짠돌이라면 아울렛이나 동대문에 가야지 왜 굳이 백화점일까. 그의 대답은 간단하다. "돈쓸데는 많고 최신유행도 따르자니 세일 때만 백화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며 웃는다. 무계획적인 쇼핑은 그의 사전에 없다. 여자들보다 더 알뜰한 세일마니아라고 부르는 게 정확할 듯. 작년 4월 CJ엔터테인먼트로 직장을 옮기기 전 그는 백화점 직원이었다. 매년 정기적인 세일을 하는 백화점에서 일한 경력 탓에 다른 남성직장인보다 세일과 친숙하다. 하지만 이런 배경이 그를 세일킬러로 만든 것은 아니다. "과거엔 세일은 쇼핑찬스라기보다 일보따리였죠.그 많은 이벤트와 보도자료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죠.회사를 옮기고 보니 세일이 생활속으로 들어오더라고요." 지난 4일 여름세일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쇼핑 리스트를 작성했다. 꼭 필요한 것만 사는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살 품목은 드레스셔츠,여름샌들,아쿠아슈즈,수영복 등 네다섯 가지.예산은 넉넉하지 않은 30만원 정도. 많지 않은 돈을 잘 쓰는 그의 노하우 중 첫째는 백화점카드 이용하기.황씨는 늘 그랬듯이 옆자리 '누님'(황씨는 선배를 이렇게 부른다)에게 빌렸다. 가격을 조금 깎아주는 DM(다이렉트 메일)과 쿠폰도 좀 얻었다. 물론 이전에 브랜드별 가격과 디자인을 인터넷으로 알아보는 건 필수다. 안목 있는 동료들의 의견 구하기도 그의 노하우."샌들은 소다,아쿠아슈즈는 르까프나 리복,수영복은 항상 찾는 아레나로…." 대충 마음을 정한 그는 지난 주말 롯데백화점 본점을 찾았다. 세일 때 자가용이용 대신 지하철을 타는 것도 몸에 뱄다. "주차시간이 쇼핑시간보다 길어지거든요. 백화점에 주차장 찾으러 가는 것 아니잖아요." 뭘 타고 가느냐는 물음에 되돌아온 것은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냐는 투다. 드레스셔츠를 보러 5층에 오른 그의 입에서 갑자기 "오 마이 갓"이 터져나온다. "조금만 더 기다릴 걸." 노세일 브랜드로 알려진 남성캐릭터 정장 브랜드 '준코 코시노'가 50% 세일을 하고 있었던 것. 불황극복을 위해 백화점측이 이례적으로 마련한 반짝 서프라이즈 세일이 황씨도 모르게 시작된 것.황씨는 돌연 짜증을 낸다. '이런 것도 모르고 있다니'라는 표정이다. "지난 5월에 꽃무늬 셔츠,살구색 티셔츠,면티를 25만원 정도 주고 샀거든요. 지금 샀으면 10만원 넘게 아낄 수 있었는데." 불경기 파격세일이 '세일킬러'를 무안하게 만든 순간."몸은 안 되지만 원색적인 색감과 약간 '날티나는' 디자인 때문에 지난 여름부터 애용하고 있었는데 배신을 때리다니." 지나간 일은 빨리 잊을수록 좋은 법.매장을 둘러보다 드레스셔츠는 '바찌'제품으로 골랐다. 가격은 20% 할인된 5만4천4백원.나머지 물건은 모두 6층에서 구매했다. 샌들은 마음을 바꿔 '버캔스탁'제품(11만6천1백원)으로 샀다. 아레나 삼각수영복(3만6천원)과 리복 아쿠아슈즈(3만9천2백원)를 포함하면 이번 세일에 그가 쓴 돈은 모두 24만5천7백원.예산보다 5만원 이상을 아꼈다. 집으로 가기 전에 그가 꼭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사은품 증정코너다. 2년 전에 사은품으로 받은 도브 비누는 아직까지 집에서 쓰고 있다. "20만원 이상 백화점 카드로 구매하면 주는 게 많더라고요." 그가 카드를 빌린 이유다. 사은품도 잘 고르면 생활에 요긴하다. 이번에 나온 사은품은 선풍기 대나무자리 이불 아이스박스 목욕상품세트 등 5가지.황씨는 선풍기를 골랐다. 덜거덕거리는 5년된 선풍기를 이참에 바꾸기 위해서다. "백화점에 갈 땐 몇 천원이라도 따지는 사람으로 변해버린 게 이상할 정도"라는 황기섭씨."혼자 사는 남성직장인들도 나처럼 세일킬러가 돼야 한다"며 백화점을 나선다. 글=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