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학창시절을 보낸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한 달이 멀다 하고 지식인들의 각종 '시국선언'이 발표됐었다. 독재정권의 권력 농단과 민주주의 압제를 고발하는 내용의 시국선언들은 불행했던 한 시절의 기록이었다. 지난 주말,한동안 뜸했던 그 시국선언을 오랜만에 접했다. 3백여명의 전문경영인들이 '최근 국내 상황에 대한 견해와 각오'라는 성명서를 내놓은 것이다. 기업인들의 시국선언을 읽는 심정은 복잡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은 속성상 보수적이고,그래서 대놓고 집단적으로 의견을 표출하기를 꺼리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이 시국선언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CEO들의 성명서는 "우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는 시작구절까지 예전의 그것들과 닮은 꼴이었다. 과거와 달리 독재 타도,계엄 철폐,인권 보장 같은 구절이 없다는 것에서 '역사의 진보'를 새겨야 할까. 기업인들의 성명서는 그러나 '절절함'에서 과거보다 덜하다고 하기 어렵다. "진보와 보수,근로자와 사용자,성장과 분배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국론이 분열되고 이익집단간 충돌로 사회적 갈등과 비용이 확대되고…"를 고발한 이들의 성명서에서 '무엇을 위한 민주화였는가'라는 화두(話頭)를 꺼내들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잘못된 관행이나 왜곡된 질서는 분명 바로잡아야 하나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세력을 청산 대상으로 매도하는 편파적 사고는 위험하다"는 충고를 기득권자들에 의한 '개혁 저항'으로 넘겨버려서는 곤란하다.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담지 않은 '잡초 제거'나 '개혁 만능주의'의 부작용은 임기 초반 비슷한 실험을 실패로 끝냈던 과거 정권의 경우로도 충분히 입증된 바다. 물론 과거 권위주의적 독재정권 시절에 배태됐고 자라난 정경유착,그 사생아로 번식했던 비자금과 회계분식,미흡했던 노동권 보호 등 타파돼야 할 '구악(舊惡)'이 잔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기'식의 개혁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성장보다 분배'의 기치 아래 취해지고 있는 친(親)노동정책과,'시장개혁'의 이름 아래 가해지고 있는 기업활동 제약 등이 투자를 후퇴시키고 기업을 위축시키고 있는 현실을 정부는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성장 못지않게 분배도 중요하고,사회적 약자들이 최대한 보호받아야 한다는 건 당연한 명제다. 현 정부의 이런 '선의(善意)'에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한 의도들로 포장돼 있다"는 영국 속담도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한다. 생산성을 담보하지 않은 대폭적인 임금 인상과 복지 남발로 아르헨티나 경제를 망친 '페로니즘(대중 영합주의)'도 출발점은 '선의'에서 비롯됐던 것임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경영학 용어 중에 '몰입 상승(escalating commitment)'이라는 말이 있다. 지도자가 잘못된 의사결정을 내리고도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이는 걸 가리킨다. 지도자가 이런 오류에 빠지는 것은 첫 단추를 잘못 꿴 줄은 알지만 그동안 들인 비용(sunken cost)이 아까워서 그러는 경우도 있고,아집의 틀 속에서 독단(獨斷)을 벗어나지 못한 결과인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건 그가 이끄는 조직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가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현 정부의 지지기반인 노조들이 집단 '하투(夏鬪)'에 나서면서 기진해있는 경제에 또 한번의 타격을 가하고 있는 지금,정부는 '선의'를 선한 결과로 열매 맺게 할 방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