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비현실적 상황을 그럴 듯하게 그려낸다. 주인공은 초인적 능력으로 악당을 소탕하고 정의를 세운다. 가상의 세계를 실제세계와 혼동하도록 제작하는 것이 영화인의 능력이다. 스크린쿼터의 논리를 보며 이런 영화인의 속임 능력에 재삼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스크린쿼터는 모든 극장에 1백46일간 국산영화 상영을 의무화시키는 영화인보호제도다. 국가유공자 유가족의 고용의무와 같이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집단'에 특권을 할당하는 제도다. 이런 전형적 이권제도를 문화주권수호 영화인만이 아닌 대한국민 모두의 권익장치로 포장해,어떤 경제적 이익도 침해할 수 없는 성역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이창동 장관은 국회 문광위에서 "영화는 상업논리가 아닌 문화논리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문화논리란 무엇인가. 미국영화가 유럽영화를 제압한다고 유럽이 미국의 문화적 속국이 되는 것인가. 스타워즈나 타이타닉의 흥행성공으로 미국문화가 더 고상해진 것인가. 조폭마누라 같은 영화가 뜨고,국산영화의 시장점유율이 일약 47%로 솟았다고 해서 한국문화가 도약한 것인가. 영화는 대중오락일 뿐이다. TV 팝뮤직 브라질축구와 같은 흥행산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상업논리'가 지배하는 곳이 영화제작업이다. 대중에게 살인 엽기 섹스 폭력을 전파할 수록 흥행성공이 보장되는 것이고,한국영화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문화영화' 상영기회가 보장돼야 한다며 스크린쿼터를 세워 폭력 섹스영화가 90% 무임승차하겠다는 것이 문화논리인가. 영화인들은 그들이 우습게 보는 '경제적 이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은 초(超)국적기업의 시대다. 이른바 한국의 대표기업인 삼성전자는 소유지분의 53%가 외국인 것이고,현대자동차는 46%,국민은행은 67%이다. 국적(國籍)이 여하간에 기업은 투자환경이 안좋으면 나라 밖으로 간다. 외국투자가 이탈하면 증권시장이 추락하고,국민소득이 하락하고,영화관객수도 아마 줄어들 것이다. 스크린쿼터는 지난 98년 타결직전의 한·미투자협정(BIT)을 무산시킨 이래 오늘날까지 그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의 외국인투자실적(신고기준)은 2000년 1백52억달러에서 작년 91억달러까지 하락하다가 금년 1분기에는 아예 작년의 절반수준인 11억달러로 추락했다. 반면 사회주의 국가라는 중국(계약기준)은 2000년 6백24억달러에서 작년 8백27억달러로 급증하는 추세다. 이것은 물론 영화인뿐 아니라 정권의 이념성,집단이기주의 옹호성향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문제다. BIT가 체결되지 못했으니 우리가 얼마나 투자를 잃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국산영화 관객수가 50%에 육박하는 한국이 집요하게 스크린쿼터를 고수하고 있다. 적어도 지구촌 외국인들에게는 한국땅이 얼마나 독선적 배타적인지 강한 메시지로 전달됐을 것이다. 스크린쿼터 축소가 '미국영화산업을 위해 한국영화산업의 보루를 없애려는 매국적 친미사대주의 발상'이라는 선전 이상의 국수주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스크린쿼터론자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예를 곧잘 든다. 그러나 프랑스는 현장확인의 어려움 때문에 1백12∼1백40일로 규정한 스크린쿼터를 실제 집행해 보지도 못했고 지금은 그나마 폐지했다. 스페인은 스페인영화 아닌 EU영화의 20% 의무상영을 명령할 뿐이다. 이런 제도의 유효성을 떠나 왜 이 희귀한 사례만이 한국이 따를 모범이 돼야 하는가. 영화인들이 득세하며 스크린쿼터론자의 목소리에 한층 힘이 실렸다. 정부는 진정 이 이익집단의 문화산업 수호논리를 수긍하도록 무지한 것인지,아니면 우호세력이니까 봐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 화려한 영화인의 복지를 위해 그들의 일자리를 기꺼이 희생하며 현혹되기를 마다 않는 한국의 취업세대처럼 딱한 사람들도 없다. 프랑스건 한국이건 스크린쿼터 같은 논리가 통하는 사회는 문화사회를 운위할 자격이 없다. 이런 사회에서는 소주 청주 막걸리업자도 1백40일 한주(韓酒) 판매만을 의무화시키는 주점쿼터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kimyb@c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