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유학에서는 정명(正名)사상이란 것이 있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는 것이고,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면 '고개숙인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정부가 정부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부가 정부다우려면 법과 질서,원칙을 말해야 한다. '코드'를 말하고 '잡초'를 강조한다면,정부답지 못한 것이고 '정부의 실패'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정부가 정부답지 못해 일어나고 있는 '정부의 실패'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각종 집단행동과 집단이기주의에 원칙없이 휘둘리고 있는 정부가 너무나 안쓰럽다. 참여정부가 그럴 만한 힘과 권위가 없는 것도 아닌데,국민에게 다가가기 위해 스스로 몸을 낮추는 것인지,아니면 지난 대선 때 자신을 지지했던 세력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떤 사회집단이라도 자신의 집단행동과 요구를 이기주의라고 포장해서 말하는 어리석은 집단은 없다. '인권존중'을 외치기도 하고,'약자'를 표방하며 제도상의 허점과 부조리를 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집단행동을 벌이지 않은 다른 집단들도 따지고 보면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다. 화물연대만 할 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레미콘업체들도 할 말이 있고,버스나 택시업계도 마찬가지다. 전교조가 할 말이 많다면,교총도 할 말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목청이 크다는 이유로,단식농성과 연가투쟁,시위에 능하다는 이유로,선거 때 현정부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고 법과 원칙을 접는다면,어떻게 '참여정부'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경제가 한없이 추락하고 있는데,집단행동에 발목이 잡혀 오락가락하는 정부에서 어떻게 공신력을 음미할 수 있는가. '시장의 실패'를 교정하려면 법과 원칙이 바로 서야 하는데, 법과 원칙이 갈대처럼 꺾이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수로 시장행위자들을 다독일 수 있단 말인가. 누구나 어렸을 때 미끄럼을 타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한번 미끄럼틀에 올라서면 항우장사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그냥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법과 질서가 '미끄럼틀'위에 앉아있는 형국이다. 두산중공업 철도노조 화물연대 파업에서 정부는 법과 원칙을 접었다. 또 정부의 기존입장을 포기하고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의 폐기를 요구하는 전교조의 요구를 전폭 수용했다. 이런 상황이 거듭되다보니 법이 '미끄럼'을 타서 불법이 되고,신뢰가 '미끄럼'을 타서 불신이 되며,'권위'가 미끄럼을 타서 무질서가 됐다. 이런 사태는 딱히 누가 법 불복종운동이나 권위 불복종운동을 벌여서가 아니라,정부 스스로 필요한 곳과 필요한 상황에서 법과 권위를 행사하지 않아 자초한 일이다. 때때로 우리는 양보를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한다. 티격태격 격렬하게 싸우는 와중에서 한걸음 두걸음 양보를 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지만 정부의 양보만은 다르다. 정부가 일부 집단의 요구를 들어주는 과정에서 원칙없이 양보한다면,미덕이 아니라 악덕일 뿐이다. 다른 집단들도 정부의 양보에 대해 '합리적 기대'를 하게 되고,결국 봇물처럼 집단행동이 야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원칙없는 정부의 양보는 '선순환'이 아니라 '악순환'을 가져오게 된다. 또 이러한 사태는 약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약자에게도 여러 가지 범주의 약자가 있다면,목소리를 내는 약자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약자를 압도하는 상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자가 약자를 압도하는 상황만큼이나 부조리하지 않은가. 지금은 정부의 '펀더멘털'을 곰곰이 생각해 볼 때다. 법과 원칙이 없는 정부는 '팥없는 찐빵'과 같다. 특정 집단이나 이익단체의 요구를 공익적 요구처럼 들어주는 상황에서 '벌거벗은' 정부의 모습을 떠올릴지언정,어떻게 공평무사한 정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단 말인가. 법과 질서,권위와 신뢰,모든 것이 미끄러져 내리면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전체가 '천둥 벌거숭이'가 된다. 참여정부 출범 석달만에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미끄러지게 됐는지, 국정책임자들은 겸허한 마음으로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