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중 가장 아름다운 달을 꼽으라면 나는 단풍 지는 10월보다는 5월을 말하고 싶다. 5월은 새로 출발하는 삶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대지에서 생명의 싹이 꿈틀거리고,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꽃잎과 나뭇잎을 보면 우리는 신의 축복에 감사하고 생명의 의연함에 감탄하게 된다. 봄과 함께 시작하는 것은 편안하고 희망에 차있다. 인생의 10월에 도착하면 그러나 삶과 희망이 그렇게 장밋빛만은 아니라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어느 심리학자의 얘기를 빌리면 인간관계의 결별을 맞을 때 4단계의 수습과정을 겪는단다. 즉 부정 분노 그리고 슬픔 후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말이다. 한국과 세계, 또는 미국으로 대변되는 선진국과 우리의 외교관계를 보아도 그런 면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전쟁 이후 한.미 관계는 구호물자 포장지에 찍혀있던 악수하는 두 손처럼 동방예의지국과 선량한 백인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모든 것이 복잡해지면서 우리는 홀로 서기를 배워야 했고, 자립이냐 의존이냐 신의를 지켰느냐 배신이냐 하는 국제관계의 다중성을 경험했으며, 분노의 촛불 행사를 치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북한과 미국을 포함해 대외관계의 성숙단계에 들어가야 할 때다. 실질적인 우방국이 어느 나라인가를 잘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개인과 국가의 삶의 과정이고 성장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중국 광둥성에서 시작했다는 사스는 아시아는 물론 북아메리카 유럽에까지 퍼졌다. 청결하지 못한 환경에서 발생한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확대된 예다. 중국에서 시작된 황사가 우리나라에 오면 숨쉬기 곤란하다. 인접국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중국은 조림사업이나 환경사업에 투자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핵문제도 그렇다. 국제적으로 핵 폐기협정이 맺어졌던 사실을 잊었는지, 북한은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다는 카드를 내놓았다. 핵은 북한의 독자적 문제일 수 없다. 국경, 혹은 주권을 내세우면서 이웃나라를 외면하는 일은 용인되지 않는다. 주권이라는 개념, 즉 권리라는 얘기가 나오니까 스코틀랜드 출신 신약성서학자 윌리엄 버클리의 권리에 대한 해석이 생각난다. 버클리는 "자연인에게는 누구나 주권을 행사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반면, 크리스천은 오직 의무만 있을뿐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모든 생명은 기독교적 개념으로 본다면 하나님에게서 물려 받은 것으로 우리는 오직 이것을 잘 가꾸고 보존할 의무만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고 그로 하여금 모든 생물의 주인이 되라고 한 뜻은, 자연을 손질하고 나무와 물고기와 꽃들의 종이 돼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1918년의 독감은 4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스의 횡포가 독감처럼 크지 않기를 빈다. 핵문제도 전쟁 없이 합리적으로 해결되기를 빌어본다. 세계적인 환경보호운동에 앞장서고, 서울에서 부산 목포까지 뻗어나간 고속도로와 잘 다듬어진 관광지를 깨끗하게 보존하는 동시에 한반도 특유의 문화재를 훼손하지 말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인생의 성장단계에서 필연적으로 겪는 탄생과 죽음을 언급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 5막2장에 나오는 에드가의 대사, 즉 'ripeness is all!'이라는 말은 의미 심장하다. 자아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를 살면서 싸우면서 울면서 배우고, 부지불식간에 산다는게 뭔지 알 것 같아지면 인생을 마감할 때라는 말이다. 그렇게 그 혼돈과 무의식 속에 인생을 살다 마감해야 한다면 인간은 보람을 느낄 수도 없고, 어느 시점에서는 피곤에 지치게 된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현상세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고통을 일상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를 결심할 수만 있다면 인생의 묘미는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동양의학에서 죽은 풀뿌리가 한약재가 되어 병을 치료하듯이, 서양에서는 마른 꽃잎이나 꽃씨를 이용해서 향수를 만들어 왔다. 나의 숨길이 머물다 간 자리가 아름답기를 원한다. 우리가 쓰고 간 한반도의 모습이 후손에게 향기와 치유의 덕을 베풀어 주기를 기대한다. < janghr@hanya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