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사는 주부 노경하씨(36).노씨는 올들어 부쩍 살림살이에 스트레스를 느낀다. 항상 빠듯한 남편의 월급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이라크전이다,북핵이다 해서 다들 허리띠를 졸라매는 분위기로 흐르기 때문이다. 자영업자들 얘기로는 경기가 완전히 바닥이라고 한다. 노씨는 이런 대세에 순응하는게 주부의 지혜라고 생각해 한푼이라도 아낄 수 있는 방도라면 모조리 활용키로 했다. 노씨가 하루종일 궁리한 끝에 내린 결론은 발품을 팔자는 것.'싼 곳 찾아 10만리'를 모토로 삼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정보 수집이 필수적이다. 가격비교 사이트를 열심히 뒤지고 신문에 끼여 들어오는 전단지도 수험서 보듯 꼼꼼히 체크하기로 했다. 이 정도만 해도 효과가 꽤 있다. 우선 근처 롯데마트 영등포점에서는 일석이조의 이벤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매일매일 내용을 달리하는 게임형 이벤트를 열고 있는 것.사과깎기 대회,방울토마토 무게 알아맞히기,초밥 만들기 등 재미있는 게임이 수시로 열리고 있다. 스트레스도 풀고 상품도 받아오는 일석이조 게임이다. 자동차로 5분 거리인 홈플러스 영등포점에서는 얼마전 가격을 10% 이상 내린 상품이 꽤 많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일요일에 홈플러스에 가서 맨 먼저 구입한 상품은 홈플러스 자체상표(PB)로 된 셔츠와 화장지였다. 이들 상품은 다른 상품보다 가격인하폭이 훨씬 컸기 때문.어쩌다 한번씩 가는 영등포역 앞 백화점에 갈 때 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5% 할인쿠폰을 꼬박꼬박 지갑에 챙겨넣고 가기로 했다. ◆짠돌이 소비자만 득실 밤 거리에는 빈 택시의 긴 줄을 쉽게 볼 수 있다. 서울 도심과 경기도 지역을 연결하는 사당역 강남역 잠실 영등포역 등에는 자정을 넘기고도 손님을 태우지 못한 택시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택시기사 김모씨(53)는 "IMF때보다 불경기가 더 심한 것 같아요"라고 푸념한다. 경기의 바로미터는 택시 뿐이 아니다. 충무로 인쇄시장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H기획 K사장(50)은 "올들어 인쇄물량이 점점 더 떨어지는걸 보면 경기가 언제 풀릴지 요원하다"고 말했다. 회사원 임형숙씨(26)는 지난달 직장생활 3년만에 처음으로 점심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여직원 휴게실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용돈을 꽤 절약할 수 있게 됐다. 웬만한 식사는 5천원이 넘는데다 점심 먹으러 오가는 길에 커피숍이나 편의점에서 쓰는 돈도 만만찮기 때문이다. S백화점 홍준상 과장(35)은 출퇴근 교통수단을 지난달부터 자가용에서 전철로 바꿨다. 휘발유 가격이 ℓ당 1천4백원 가까이 오르면서 홍 과장은 자가용 출근을 포기했다. 더욱이 이라크전쟁이 초기 예상과 달리 장기화될 우려가 높아지면서 자가용은 공휴일 가족외출용으로 용도를 변경할 작정이다. 같은 직장에서도 홍 과장처럼 자가용을 집 마당에 두고 오는 동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젊은이들 사이에는 청바지 차림이 늘고 있다. 여성들은 청색 미니스커트를 장만하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다. 세탁하는데 손이 많이 가고 관리비용이 많이 드는 면바지보다는 청바지가 실용적이다. 생활필수품 쇼핑장소인 할인점에서도 상대적으로 비싼 상품은 잘 팔리지 않는다. 비싼 배추 대신 열무얼갈이가,한우 대신 수입육이,갈치나 도미보다는 삼치나 고등어를 찾는 손님이 늘고 있다. 이른바 '대체상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다. 할인점의 자체상표(PB) 상품이 잘 나가는 것도 품질보다는 가격에 더 눈길을 주는 소비자들 덕분이다. ◆유통업계도 비상작전 시동 이라크전쟁의 불똥이 곧바로 유통업체들에 튀고 있다. 비록 먼 나라이지만 소비심리가 얼어붙을 수 있는 외부 요인이다. 불황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고 씀씀이를 줄이는 경향도 짙다. 불황을 정면 돌파하려는 업체들의 노력도 눈물겹다. 우선 경매행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일단 점포에 손님을 끌어들이려는 고육지책이다. 테크노마트는 간헐적으로 벌였던 경매행사를 매주 실시하고 있다. 매달 휴무일인 둘째,넷째주 화요일에 벼룩시장을 열어 전산 소모품이나 소형 가전제품을 정상가보다 20%이상 싸게 판다. 신세계 이마트는 한개 값으로 두개를 주는 '1+1'행사와 두개를 사면 하나를 덤으로 주는 '2+1'행사 횟수를 늘렸다. 연중 2∼3회가 고작이었으나 올들어선 매달 2회씩 진행하고 있다. 그랜드마트는 야간고객을 잡기 위해 오후 8시 이후 구매고객에게 3천원짜리 식품구매권을 주는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온라인 유통업체들도 전쟁의 유탄을 맞기는 마찬가지다. 경매업체 옥션은 지난해 3월 없앴던 '천원경매' 코너를 최근 부활했다. 이 코너는 경매 시작가격이 1천원으로 책정된 상품만 모아 판다. SK디투디는 제품 성능에는 문제가 없으나 포장이나 외관에 흠이 생긴 상품을 싸게 파는 '디스카운트숍'을 열었다. 강창동 유통전문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