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가 전쟁으로 들썩거리고 있다. 바그다드는 불바다가 됐고 주변 국가들도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중동 지역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현장을 지키는 우리의 기업인들이 있다. 그들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상품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가 하면 비즈니스의 생명인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위기일발의 상황에서도 거래선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민간 외교사절이며 곧 '수출 한국'의 얼굴이기도 하다. 실제로 생사를 넘나들며 전쟁터를 지켰던 기업인들의 이야기를 모아봤다. ◆백효휘 전 케피코 사장=총알이 빗발치는 현장에서 회사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케이스. 1979년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란 회교혁명 발발 당시 현대건설 테헤란 지점장으로 재직하던 그는 기관총이 난사되는 이란 남부의 반다라마스 항만건설 현장에서 8천만달러 규모의 건설장비를 고스란히 빼내왔다. 반다라마스는 세계에서 가장 더운 곳으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곳.당시는 며칠째 50도를 넘는 혹서가 계속되던 시기였다. "항만공사를 하려고 새 장비를 8천만달러어치나 들여왔지요.당시 8천만달러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그런데 공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혁명을 맞았어요.순식간에 이란 전역이 전쟁터가 돼버렸지요.날씨는 못견딜 정도로 덥고 총탄은 날아드는데…" 백 사장은 남은 부하 직원 2명에게 이란을 탈출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들도 끝까지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무엇보다 큰 고민은 장비를 무엇으로 옮기느냐는 것. 백 사장은 전에 근무하던 바레인의 현지인과 간신히 연락이 닿아 바지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반다라마스 현장에서 야음을 틈타 간신히 장비를 실었는데 출항 직전 군인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말도 마세요.기관총은 곳곳에서 난사되는데 바지선은 검문에 걸리고…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장비를 현장에서 빼낸 백 사장은 "아마 이란에서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외국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주영 당시 현대건설 사장은 사옥 현관까지 뛰어나와 차에서 내리는 그를 얼싸안았다. 백 사장은 "지금 같으면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면서도 "월급쟁이로서 가장 보람있었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곽윤태 전 동아건설 사장(관리인)=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기습 공격했던 90년 8월초 현대건설 바그다드지점 관리담당 상무였던 곽 전 사장은 쿠웨이트 현장인력 2천여명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라는 본사 연락을 받았다. 바그다드지점은 현장인력을 쿠웨이트의 적대국인 이라크로 이동시킨 후 다시 요르단으로 대피시키는 상상 밖의 계획을 '감행'했다. 승용차 버스 트레일러 등 현장에 있던 바퀴 달린 운송수단은 모두 동원됐다. 바그다드지점은 쿠웨이트 현장관리팀에 이라크 내 접선장소를 알려주고 그 장소에 '현대' 팻말을 박아두고 무작정 기다렸다. 한밤중 사막에서 앞차 꼬리를 놓친 버스 등은 시도 때도 없이 접선장소에 도착했다. 때문에 바그다드지점원들은 접선장소에서 일주일간 밤샘근무를 하기도 했다. 열흘 만에 엑소더스 작전은 끝났다. 그것도 한 명의 부상자도 없이…. 당시 바그다드지점에 근무했던 현대건설 임직원들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토막잠으로도 일주일간을 버텨내게 한 것 같다"며 끔찍했던 기억을 회상하곤 한다. ◆최형진 (주)쌍용 이사=91년 걸프전이 터졌을 때 최 이사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주재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기 전 가족들은 귀국했고 최 이사는 머리 위로 미사일이 날아가는 전장에 홀로 남았다. "의지할 것이라곤 본국에서 공수된 방독면뿐이었어요.방독면 하나에 목숨을 걸고 낮에는 텐트나 군복 등 군수물자를 팔고 공습이 시작되는 밤에는 숨죽여 단파수신기로 BBC 방송을 들었어요." 이라크가 생화학전을 펼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아 물을 받아놓고 담요로 창문을 가렸다. 이라크에서 쏜 스커드 미사일이 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하자 남아있는 주재원들 사이에서는 귀국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결국 모두 남아있기로 했다. "목숨이 걸려있는 상황에서도 주재원들은 '스커드 미사일에 맞을 확률보다는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이 더 크다'며 현장을 지키자는 뜻을 모았죠." 전쟁 중에도 텐트 군용천막 철강 등 바이어들의 오더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뱃길이 막혀 주문한 물품이 제때 도착하지 않아 발을 굴러야만 했다. "제다항이 막히면서 그곳으로 도착해야 할 물품이 예멘 등 다른 항구로 아무렇게나 들어오는 것이었어요.전쟁 중에 그 짐들을 찾아서 바이어들에게 가져다주느라 엄청 고생했어요." 최 이사는 "12년이 지난 지금 전쟁이 다시 시작되자 그때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난다"며 "전쟁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애쓰는 비즈니스맨들이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소문호 삼성물산 건설부문 부장=이라크 바그다드에서 고속도로건설 공사를 끝내고 유지보수작업을 하던 91년 1월 13일 서울본사로부터 철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태국 기능인력을 포함,현장에 있던 40여명은 요르단으로 피신키로 했다. 그날 아침 미리 예약한 2대의 버스를 기다렸는데 1대만 왔다. 비좁은 버스를 타고 1시간30분을 달려 요르단 국경 검문소에 도착했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라크 외무부에서 발급한 여행허가서 없이는 국경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는 "탈출을 못하는 게 아니냐"는 술렁임과 함께 불안감이 엄습했다. 대사관의 도움으로 여행허가서를 받아 다음날 새벽 4시께 국경에 도착,오전 9시쯤 국경을 넘었다. 요르단 공항이 폐쇄돼 요르단 암만에서 즉석사진을 찍어 비자를 마련한 후 선박편으로 바그다드를 출발한 지 8일 만에 이집트로 대피하는 데 성공했다. 소 부장은 "이라크 국경에서 바그다드로 되돌아갈 때가 가장 불안했지만 8일 동안 연락이 끊겼던 탓에 서울에 있는 가족들이 더 힘든 나날을 보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김호영·김미리 기자 hy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