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구호의 나라다. 정권과 정책을 두고 너무 많은 구호가 난무하고 있다. 내용이 없는 구호,불분명한 구호,말이 안되는 구호,상호 모순되는 구호를 내세워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추진하려 하니 정책이 말잔치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새로운 정권이 탄생할 때마다 각 정권은 스스로를 새로운 구호로 규정하고 장식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최근 세 정권의 구호였다. 구호의 글귀만 보면 정말 훌륭하다. 그러나 내세운 구호가 얼마나 말이 안되는 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 정권의 특성은 세월이 흐른 뒤에 후대가 규정하는 것이지,자신이 스스로 규정할 사항이 아니다. 선정된 구호의 글귀 자체도 문제다. 김영삼 정권은 문민정부였지,국민의 정부가 아니고 참여정부가 아닌가? 노무현 정권은 참여정부이지,문민정부가 아니고 국민의 정부가 아닌가? 결국 차별이라고는 사용한 구호일 뿐,실질 내용에 있어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정권에 대한 기치로서의 구호뿐만 아니라 국가의 구체적 정책을 두고도 구호가 수없이 사용돼 왔다. 선진조국 창조,생산적 복지,참여복지,국가 균형발전,시장 개혁 등등 수없이 많다. 문제는 이 구호들이 좋은 언어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없거나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군사정권 시절의 구호인 선진조국 창조를 보자.외견상 선진조국 창조는 필요한 것 같은데 문제는 무엇이 선진조국이냐 하는 것이다. 목표를 선진국이 되는 것으로 하더라도 도대체 어떠한 수준에 이르러야 선진국이 된다는 것인지 필자는 모른다. 선진조국 창조가 내용이 없는 허황된 구호였기에 구호가 외쳐진지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나라는 선진조국이 되지 못했다. 복지를 두고 김대중 정권 때는 '생산적'이라는,그리고 현 정권은 '참여'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생산적 복지와 참여복지라는 말이 학문적 용어가 아니라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참여복지라는 말이 나온 후에 장관 이하 보건복지부 전 직원이 그 개념을 규정하기 위해 토론회를 갖는 촌극이 벌어진 바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참여복지가 무엇인지를 명쾌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참여복지가 무엇인지 정책담당자도 국민도 모르는데 어떻게 참여복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최근에 나타난 현상으로 지적돼야 할 사항은,구호를 만든 사람들이 그 구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시장개혁'이다. 참여정부는 당초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을 국정과제의 하나로 강조했다. 그 과정에서 재벌개혁이 강조되더니 재계의 지적과 경제여건의 변화를 빌미로 최근에는 재벌개혁 대신 시장개혁이란 구호를 사용하겠다고 공식 천명한 바 있다. 문제는 시장개혁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시장을 개혁해 '반(反)시장' 아니면 '비(非)시장'으로 가자는 것인가? 대한민국은 헌법상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다. 그러므로 시장은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보호되고 권장돼야 할 대상이다. 사안이 이러함에도 시장개혁이 정부정책의 구호로 전면에 부각되고 있으니 안타깝다. 국정과제로 제시된 구호들을 놓고 볼 때 또 하나의 문제점은 그 구호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시책이 전혀 내용이 없거나,관련 없는 사항들이 나열되고 있다는 점이다. 부패 없는 사회의 구현을 위해서 국가시스템 혁신,투명 공정한 인사시스템 확립,행정개혁을 하겠다고 하는데,이들 세칙으로 부패 없는 사회가 어떻게 구현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정권과 국가정책을 두고 구호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과 같이 모호하고,내용도 없고,제대로 된 시책으로 뒷받침되지 않은 구호가 난무하면 정책목표는 달성되지 않는다. 그 결과 구호만 허공에 메아리칠 뿐 국민은 허탈감에 빠지게 된다. 구호가 구호로서 작동하고,결과적으로 국가정책이 잘 되기 위해서는 구호의 개념이 명료하면서 국민들에게 똑같은 의미로 이해되고 전달되게 해야 한다. choik01@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