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중반. 한국도자기 청주공장의 전경은 보잘 것 없었다. 부실한 천장에서 눈과 비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때가 많아 원료 배합실 직원들은 우의와 장화까지 챙겨입고 일을 했다. 그래도 김 회장(당시 전무)은 70여명의 직원들을 독려하며 밤낮으로 일을 해 월 10만개의 그릇을 생산해 내고 있었다. 판자로 엉성하게 지은 공장을 빼고서라도 김 회장의 마음은 늘 무거웠다. "최선을 다해 만들었지만 남들 물건과 차별이 나지 않았습니다.그릇도매상들이 품질에 대해 깔보는 것만은 참을 수 없는 설움이었지요." 문제는 돈이었다. 제품의 품질혁신을 위해서는 새로운 설비투자가 필요했지만 사채이자를 갚는 데도 빠듯한 때였다. "당시 쓰던 소성로(가마)로는 품질의 한계가 있었지요.그렇지만 1천2백도를 내는 현대식 소성로를 갖겠다는 건 꿈같은 얘기였지요." 그러던 지난 67년 12월. 독실한 기독교인인 고 김종호 창업주와 김 회장은 기적같은 기회를 만난다. 동양선교회의 선교사를 통해 캐나다 몬트리올의 '기독실업인회'로부터 2만달러를 지원받게 된 것이다. 김 회장은 이 돈을 가지고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선진국의 최신형 소성로를 들여놓는다. "새로운 희망과 의욕이 부쩍 솟는 듯했습니다." 김 회장은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신규 기계설비를 하면서 시험가동을 하는 동안 김 회장에게는 또 하나의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세계적인 명품 도자기 업체이자 영국 30대 그룹에 포함되는 '로얄던톤 그룹'산하의 '존슨맷시'사와 '황실장미' 전사지(轉寫紙) 공급계약을 맺게 된 것이다. 이 일은 후에 한국도자기의 첫번째 히트상품이라고 할 수 있는 '황실장미'홈세트가 탄생하는 기반이 된다. 그 사이 국내 식기시장도 변하고 있었다.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제품보다 우아하고 기품 있는 생활도자기를 찾는 추세가 차츰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런 취향을 가늠한 김 회장은 홈세트 종류를 혼수,선물용 및 일반가정용으로 구분해 6인,8인,12인용세트로 개발해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황실장미 홈세트가 국내에 첫 선을 보인 때가 68년. "'황실장미'의 반응이 좋았습니다.그러자 워커힐을 비롯한 각급 호텔에 커피세트며 홈세트 식기들을 납품할 수 있는 길도 뚫리더군요.'한국도자기가 홈세트를 개발해 호텔 납품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도자기 판매시장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때를 놓칠세라 김 회장은 '황실장미 홈세트'를 화면에 담아 텔레비전 CF광고를 시작한다. 당시로서 텔레비전 CF는 국내 도자기업종에선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황실장미 홈세트의 판매는 급속하게 신장했다. 이를 지켜본 김 회장은 체계적인 판매망 구축에도 관심을 갖는다. 한국도자기의 제품만을 취급하는 전문대리점 중심의 지역총괄시스템을 갖추겠다는 계획이었다. 비로소 생산,조직,판매의 3박자를 갖출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황실장미 홈세트'가 전국의 시장을 누비기 시작하면서 한국도자기는 부채를 줄여나가는 동시에 현대적 경영방식을 축적하게 된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