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3월 어느 날. 김동수 회장(67)은 부친인 고 김종호 한국도자기 창업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도자기 회사를 인수는 했지만 생산되는 제품의 질이 너무 낮고 인수 당시 진 빚 때문에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다.네가 고향에 내려와 도와주면 어떻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벽돌가마에서 초벌구이로 적당히 구워낸 조잡한 사기그릇을 생산하던 청주의 '충북제도회사'라는 업체를 부친이 인수한 직후였다. 김 회장이 연세대 경제학과를 막 졸업한 때이기도 했다. 당시 김 회장은 경제학자로서 대학강단에 서는 꿈을 갖고 있었다. 고학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유학을 준비하던 차였다. 부친의 편지에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동시에 가슴이 아팠다. 장남으로서 우선 집안을 구하고 나중에 꼭 유학길에 오르리라 다짐하며 청주로 향했다. 약혼녀(부인 이의숙 여사)마저 서울에 남겨둔 채였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병 김 회장의 도자기 인생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런데 가서 보니 생각한 것보다 상황은 더 절박했다. "판잣더미로 지어진 공장에서 30여명 남짓한 종업원들이 일하고 있는데 그나마 월급도 석달치나 밀려있더라고요.또 벽돌가마를 새로 짓고 월 5만여개의 사기그릇을 생산했는데 때맞춰 쏟아지는 스테인리스나 플라스틱 식기에 밀려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경제·경영지식을 써 볼 상황이 아니었다. 월급을 제대로 못받는 직원들이 서울에서 온 젊은 사장 아들의 말을 들을리도 만무했다. 도리어 사장 아들이 마음대로 들쑤시고 다닌다는 평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공장 주변은 물론 지저분한 화장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퇴근후 저녁 늦은 시각에도 사기그릇을 운반할 때 쓰던 새끼를 직접 꼬았다. 직원들과 한솥밥을 먹기 위해 공장의 밑바닥 일부터 솔선수범한 셈이다. 그제야 직원들도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사업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힘들었다. 그는 정성껏 품질개선을 독려하는 한편 주로 충북일대에서 판로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서울 납품처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제품을 한 트럭 싣고 천안 수원 서울 인천을 한바퀴 돌아 주안에서 도기원료인 점토를 싣고 오곤 했습니다.그러다 통행금지에라도 걸리는 날이면 한겨울 빙판위 차 안에서 새우잠을 청했지요." 43년 일제말에 생긴 충북제도사는 61년 한국도자기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한국도자기는 올해로 창립 60주년을 맞이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김 회장이 빚더미 회사에 들어와 직접 물걸레질을 하며 질그릇에 꿈을 키워온 세월이다. 그동안 그는 직원 1천여명에 연간 매출 7백50억원을 일궈내는 국내 대표적인 도자기 전문업체로 회사를 성장시켰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