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가 아닙니다.이 소리도 아닙니다.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1970년대 공전의 히트를 친 진해거담제 '용각산'의 광고카피다. 용각산은 한국 광고사에 명카피로 기록될 이 광고문구로 지금도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제품으로 남아 있다. 용각산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오늘의 보령그룹을 존재하게 만든 원동력이자 "소비자가 다가오지 않으면 소비자에게 다가간다"는 김승호 회장의 도전적 기상과 열정이 담긴 첫 제품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1963년 동영제약 인수로 제약인의 길로 들어섰다. 부도 위기에 몰렸던 동영제약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동영제약'이란 상호와 제약업 허가뿐이었다. 김 회장은 우선 종로 연지동 자택에 설비를 들여놓고 정부가 제조방법과 처방기준을 정해놓은 '약전품'을 만들었다. 김 회장은 업계 파악과 경험 축적으로 3년을 보낸 후 본격적인 투자에 나선다. 66년 서울 성수동에 공장을 착공하는 동시에 사명을 '동영'에서 '보령'으로 바꿨다. 김 회장은 용각산을 '보령'의 첫 작품으로 정했다. 일본회사 용각산이 개발한 이 약품은 일제시대에는 국내에 유통됐으나 해방 이후에는 일본을 오가는 사람들이 소량으로 들여오거나 밀수를 통해 조금씩 거래되는 정도였다. 김 회장은 일본 용각산과 기술 제휴에 나섰으나 쉽지 않았다. 일본 용각산이 갓 걸음마를 뗀 보령에 기술 이전을 해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1년여에 걸친 끈질긴 설득작업을 통해 결국 기술제휴를 이뤄냈고 67년 6월 '보령의 용각산'이 세상에 나온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용각산은 전혀 팔리지 않았다. '일본제품보다 품질이 떨어진다''일본약으로 돈을 벌려 한다'는 등 갖가지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했다. 조악한 포장도 문제였다. 약품의 효능을 확신했던 김 회장은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소비자의 불신을 신뢰로 바꾸는 게 시급했다. 첫 출하물량 5만갑을 모두 수거하고 새로운 용기와 포장으로 소비자를 찾아 영업사원들과 함께 1회용 샘플링을 들고 직접 거리를 누볐다. 신문과 라디오 광고에 당시로선 파격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매출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광고에 퍼부었다. "광고비를 줄이지 않으면 망한다"는 경리부장의 읍소에도 김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6개월이 지나자 소비자와 약국들이 용각산을 먼저 찾기 시작했다. 매출이 급속히 늘어났다. 총 매출액이 67년 1천9백87만원에서 68년 9천4백42만원으로 무려 4백75%나 증가했다. 69년에는 매출액이 1억원을 넘어섰다. 용각산은 보령의 이름을 소비자에게 알렸고 보령제약을 어엿한 중견제약사로 자리잡게 했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