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총리 후보 인준안의 국회처리가 당초 우려했던 대로 대통령 취임일을 넘겼다. 인준안이 통과되는 대로 새 총리의 제청을 받아 조각명단을 발표하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구상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새 정부 출범을 온 국민이 축하하는 날에 정치권이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정치권이 새 정부의 발목을 잡은 행태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5년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할 당시 김종필 총리 후보 인준안이 취임일에 처리되지 못했다. 당시 DJP(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자민련 총재)공조가 정권을 빼앗긴 결정적인 원인으로 꼽고 있던 한나라당이 JP의 총리기용에 반대했던 탓이다. 이번은 대북송금 특검제 법안처리가 장애물이었지만 당리당략에 따른 정쟁우선의 정치행태라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각기 그럴듯한 이유로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변명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민주당은 집권당으로서 국정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고 국회를 원만하게 이끌어 갈 1차적 책임이 있다. 수의 절대 열세속에서 타협은 뒤로 한 채 인준안만 처리하고 보자는 일방주의적 행태는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특검법안을 인준안과 사실상 연계시킨 한나라당의 태도도 문제가 있긴 마찬가지다. 국회 과반의석을 14석이나 넘게 확보하고 있는 제1당으로서 수의 횡포에 매달린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미 고 후보에 대한 인사청문회도 끝난 마당에 고 후보가 총리로서 부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렸다면 인준안을 부결시키면 될 일이다. '인준안은 통과시켜줄테니 특검을 받으라'는 식은 국민을 무시한 발상이다. 여야가 최근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언급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나 여야가 대화하고 타협하는 '상생의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마치 우리 정치권이 '나쁜 전통 만들기'게임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갈등과 대결로 점철된 5년전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이재창 정치부 기자 lee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