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분위기가 싸늘하기 그지 없다. 최태원 SK(주) 회장이 밤샘조사를 거쳐 전격적으로 구속되자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설마…'했던 재계 3위 그룹 총수의 구속이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검찰이 최 회장에게 적용한 혐의가 '배임'이어서 충격은 더욱 크다. 재계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져 오던 비상장 주식의 내부거래문제는 그동안 증권거래법에 의해 과징금 부과 등으로 처리돼 왔다. 이에 따라 비슷한 문제로 시민단체와 갈등을 빚고 있는 기업들은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비상장주식 내부거래를 배임으로 본다면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수사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와 국세청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아 기업들은 이번 사태에 대한 언급조차 꺼리고 있다. 유상부 포스코 회장의 연임 문제도 '권력의 힘'과 관련, 주목받고 있다. 포스코는 새 정부 관계자들이 민영화된 공기업지배구조문제의 대표적 회사로 지목해 온데다 정부 입김이 작용하는 은행과 투신운용사 등에서 유 회장의 연임에 제동을 걸고 나왔기 때문이다. 포스코는 외국인 지분이 60%를 넘고 있으며 이들은 유 회장의 경영실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부의 영향력이 작용하는 지분은 7% 정도에 그친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하지만 정부는 유 회장의 연임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인 것 같다. 내달로 예정된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지만 만일 유 회장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물러난다면 정부가 민간기업의 경영을 좌지우지하는 결과가 된다. 재계로서는 다시 한번 권력의 힘을 절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경련 수뇌부가 바뀐 것도 새 정부의 파워를 느끼게 한다. 그동안 오너 총수들이 맡아오던 전경련 회장 자리에 전문경영인인 손길승 회장이 들어선 것은 재계가 새 정부의 성향을 의식한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재선임된 지 얼마되지 않은 손병두 부회장이 갑자기 자리를 물러난 것도 인수위측과 빚었던 갈등이 원인이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같은 일련의 사태는 새 정부가 소위 재벌 손보기나 기업 길들이기에 본격 착수했다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하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재계가 겨우 갈등을 수습하고 어렵게 이끌어냈던 화해 분위기는 일거에 자취를 감췄다. 권력의 칼자루를 쥔 정부측이 강하게 나오면 재계로서는 납작 엎드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혹시라도 새 정부에 잘못 보일 우려가 있는 일이라면 일단 피하고 보자는 분위기가 지배하게 된다. 그러자면 신규 사업진출이나 투자 등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괜히 문어발 경영이란 오해를 받느니 차라리 사업을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할 것이다. 나라 경제의 큰 흐름을 결정하는 대기업들이 위축되면 경제활력이 줄어드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더구나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경제사정이 좋지 못해 앞으로의 경제상황에 대한 걱정은 더욱 커진다. 대외신인도 문제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기업들이 정부에 의해 좌우된다는 이미지가 자리잡으면 경영위험도가 그만큼 크다는 평가를 받게 되고 이는 신용도 하락과 기업활동 여건 악화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큰 부작용은 국민들이 기업과 기업인에 대해 갖는 이미지가 나빠진다는 점이다. 나라 경제를 떠받치는 근간인 기업과 기업인들이 존경을 받기는커녕 정당한 평가조차 받지 못한다면 나라의 장래도 그만큼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25일 취임하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선거 후 처음 가진 기자회견에서 "투명하고 공정한 경제, 노사가 화합하는 경제로 기업하기 가장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던 약속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싶은 시점이다. b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