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얼마전 전경련 초청 '새정부 경제정책 방향'강연에서 규제는 완화하되 재벌개혁 과제는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는 자신의 구상을 재차 강조했다.

노 당선자는 재벌개혁의 논거로,외형을 부풀리고 지배력을 부당하게 행사하는 재벌의 건전치 못한 행태가 완전히 불식되지 않았고,세금 없는 재벌의 대물림 관행이 일반화되었으며,지나친 경제력 집중이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있음을 적시했다.

노 당선자의 이러한 현실인식은 우리나라 재벌이 가진 문제점에 비춰 볼 때 분명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은 나름대로의 명분과 당위를 갖고 있다.

그러나 명분과 당위만으로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정책도 '사전적 의미'의 명분과 당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정책이 당위에 치우칠수록 이상주의에 경도되어 반시장적 정책발상과 행동이 횡행했고,정책의지가 강할수록 정책오만에 쉽게 빠졌던 것이 우리의 경험이었다.

새 정부도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새 정부 재벌개혁의 핵심은,정부 주도로 재벌의 특성을 개조함으로써 바람직한 시장질서를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정책오만이다.

우리의 경제규모를 감안할 때 정부의 사전적 의도와 계획에 따른 시장의 조직적 관리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더욱이 국가권력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국책은행을 사금고화하고 민간기업이 지렛대로 이용돼 분식회계가 조장된 상황에서 재벌개혁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따라서 재벌에 메스를 가하기 앞서 법치주의를 확립하고 정부와 시장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시장규율이 작동될 때 비로소 재벌은 합리적인 경제계산과 기대형성을 통해 스스로 자율적 변신을 꾀하게 된다.

새 정부 재벌정책의 기저에는 '오너경영'에 대한 강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오너가 '일반투자자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경영특성을 가진 재벌들이 IMF외환위기를 전후해 '생존과 도산'의 엇갈린 길을 가게 된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지난 5년 간 30대 기업집단의 40%가 해체될 만큼 재벌의 판도변화는 지각변동 그 자체였다.

대마불사 신화는 사라졌고 시장과정을 통해 '수익창출 능력'을 기준으로 재벌의 옥석이 가려졌다.

시장의 생존게임에서 살아 남은 재벌은 효율이 높아서였지 변칙과 반칙이 능해서가 아니었다.

효율 측면에서 오너경영과 전문경영의 구분은 의미를 갖기 어렵다.

또한 경제력 집중은 효율 추구의 결과일 수 있다.

효율에 근거하지 않은 '부당한' 경제력집중만이 문제일 뿐이다.

새 정부는 추가 입법을 통하지 않고도 재벌개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일부 재벌의 변칙적인 부의 세습은 엄밀한 의미에서 '탈법'이라기보다는 '법망'을 피한 것이다.

따라서 현행 유형별 포괄주의하에서도 법망을 촘촘히 하고 금융감독을 강화함으로써 변칙적인 부의 세습을 막을 수 있다.

또한 윤리경영도 기업경쟁력의 한 요인이기 때문에 일정부분 시장의 처벌기능을 활용하는 것이 친시장적이다.

금융계열분리청구제도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계열분리를 청구하려면,금융과 산업간의 이종결합이 경쟁을 저해한다는 명백한 증거를 포착하고 이를 입증해야 하나 이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룹 부당지원으로 인한 금융계열사의 부실요인이 포착되면 정부개입 이전에 '시장의 제재'를 먼저 받게 된다.

계열분리제는 빅딜의 '역발상'적 측면이 강하다.

우리가 시장을 신뢰해야 하는 것은,시장이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시장에는 정부같은 '조직'은 없지만,서로의 이해가 부딪치는 치열한 곳이기에 질서정연한 시장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시장규율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 변하지 않는 기업을 예외 없이 솎아낸다.

재벌개혁이 시장규율에 맡겨져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dkcho@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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