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날의 설날에 대한 추억은 '꼬까옷'과 '맛있는 음식냄새'로 다가온다. 특히 설빔을 위한 준비는 설을 앞두고 한달여 전부터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시작됐다. '딸부잣집'으로 통하던 우리 집에서는 우리 자매들의 입성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이 유난스러웠다. 명절마다 시절에 맞는 옷감으로 예쁜 옷을 지어 입히는 것이 어머니의 자부심이었던 것 같다. 특히 설날에는 진분홍 뉴똥치마에 샛노란 호박단 저고리가 대표적인 패션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자르르 흐르는 치마 선을 위해서 지금의 실크 느낌의 뉴똥치마를,저고리 선을 잘 살리기 위해서 공단 종류인 호박단을 어머니는 선호하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치마에 대한 기억은 흐릿한데,특히 저고리를 지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 엄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안감을 넣어 뒤집으면 저고리의 모습이 완성됐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자주색 끝동과 반회장을 달고 저고리 섶과 도련의 선을 살리기 위해 들이는 정성,깃고대가 잘 맞는 지 입혀보면서 동정을 다는 과정이 장인정신이 아니고는 할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은 밤이 깊도록 졸린 눈을 비비면서 어머니의 손길을 따라 눈을 움직이며 몇번이고 어머니가 요구하시는 대로 옷을 입어보며 어머니의 작업에 동참했다. 빨리 자고 싶으면서도 어머니의 손끝에서 빚어지는 우리들의 꼬까옷에 황홀해하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화로에 꽂힌 인두를 집어 드리기도 하고,바늘에 실을 꿰어 드리기도 하는 등 보조원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어머니로서는 딸들에게 바느질을 자연스럽게 학습시키는 기회였을 것이고,우리들은 하루하루 다가오는 설날의 명절기분을 조금씩 아껴가며 맛보는 짜릿한 감동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녀간의 공감대로 똘똘 뭉쳐진 설빔은 꼬까옷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설날 아침 설빔을 차려 입고,맛있는 음식을 먹고,어른들 앞에 나란히 서서 차례대로 날아갈 듯이 세배를 하고 나면 어른들이 주시던 세뱃돈을 받는 기분 또한 흐뭇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금년에는 무엇 무엇해라' 덕담을 해 주시고,세뱃돈은 빳빳한 새돈으로 준비해 주시며,때로는 봉투 속 세뱃돈을 싼 백지에 좋은 글귀를 써 넣어주시던 그 정성은 '은근한 사랑'이었다. 마고자에 달린 호박단추를 어루만지며 우리들의 절 받기에 대견해하시던 아버지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는 설날의 추억이다. "설이 되면 해님도 한살 더 먹고, 설이 되면 달님도 한살 더 먹고 얘들아 나오너라! 키를 대보자.누가 먼저 자라나 내기 해보자"던 노래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듯 싶다. 동네를 돌며 설빔을 자랑하고 세배를 드리면 곶감이나 산자 등 넉넉한 인심으로 사랑을 나누어 주시던 동네어른들,명절뿐만 아니라 유년의 뜰은 언제나 사랑과 기쁨으로 넘쳤었다. 이런 행복했던 유년의 추억들은 6·25 한국전쟁 이후 스산스러웠던 세월을 이겨낼 수 있었던 평생의 자산이 아니었나 싶다. 막상 내가 어른이 돼서는 우리 아이들에게 행복한 설맞이를 해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항상 남아 있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설빔을 위한 바느질은 아예 엄두도 못 내고,예전의 내가 입던 설빔과 비슷한 옷을 찾아 헤매던 기억이 있다. 아이들의 설빔은 상품화돼 시장에 잔뜩 걸려 있었지만,뻣뻣한 인조공단에 온갖 색깔로 짜깁기를 하고,지나친 금박처리 때문에 순정한 설빔의 느낌은 하나도 없다. 겨우 비슷한 느낌의 금박 분홍치마에 색동저고리를 찾아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설도 이제는 가짜같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설은 귀성열차표의 예매로 시작된다. 농경사회의 명절이던 설은 도시화된 산업사회에서 부모님이 계신 곳,조상의 산소가 있는 곳으로 귀향하는 의식이 됐다. 아니면 흩어져 살던 가족이 모이는 기회로서,역상경(逆上京)의 풍경도 빚어지고 있다. 그래서 설 기분은 어느 도로가 얼마큼 막히고 있다는 뉴스에서 실감하고 있다. 진정한 먹거리문화 입성문화 놀이문화는 사라지고 있지만,그러나 설은 가족과 이웃 간에 사랑과 정을 나누며 예절을 배우는 명절로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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