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내 나이 스물아홉살이었다. 다니던 건설회사를 그만두고,그것도 갓 결혼한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사업을 일구기 위해 해외로 떠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2천달러를 들고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내렸다. 예전 '말죽거리'같은 곳에서 말뚝을 박고 텐트에서 잠자는 생활은 '노숙자'보다 나을 게 없었다. 홍해의 일몰을 보면서도 낭만에 젖을 틈이 없었다. 당초 사업을 함께 하려던 아메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동업을 할 수 없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왔다. 3개월짜리 방문비자에 찾아갈 곳도,오라는 데도 없는 국제 미아 처지에 놓이니 정말 앞이 깜깜했다. 홍해 밤하늘에 뜬 달이 수심에 가득찬 어머니 얼굴처럼 보여 가슴이 미어졌다. 그 당시 만난 같은 또래의 일본인 여행객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는 견문을 넓히려고 세계 각국을 여행중이었다. 국제 미아나 다름없는 내 처지와 너무 대조적이었다. "패배자들이 모인 것같은 이곳에서는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그의 말에 담맘행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비행기 옆좌석에 앉은 사람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동업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사우디아라비아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인 알투아르기 힐랄이었다. 당초 건축공사를 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리모델링에 손을 댔다. 그러던 것이 주종이 바뀌어 인테리어 공사가 본업이 되다시피했다. 인테리어의 '인'자도 모르니 디자인이 좋을 리 없었다. 내가 보기에도 디자인이 엉망이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틈틈이 인테리어 관련서적을 읽으며 집을 한 채 지었다. 부엌 거실 등등 곳곳을 손수 도배하고 제법 쓸만하게 인테리어를 꾸몄다. 집들이 겸 아는 사람들을 초대해 집 자랑을 하자 너도나도 인테리어를 똑같이 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폭주하는 주문에 새벽부터 일어나 자재를 준비하고 저녁에 근처 알코바시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기능공을 직접 차로 데려와 일을 시키고 다시 차로 태워다 주는 일이 계속됐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조금씩 자금이 쌓이기 시작했다. 계속 주문이 이어졌고 대부분 계약금의 절반을 선금으로 받기까지 했다. 보증도 없고 영수증도 필요 없었다. 그들은 내 스폰서의 친구들,친구의 친구들이었고 나를 깊이 신뢰했다. 이 '신뢰감'은 사우디에서 얻은 가장 값진 자산이었고 이후 우리 회사의 기본정신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국을 떠난 지 2년이 되어갈 쯤 첫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내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아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처자식이란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사무치게 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향수병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정말 아이가 보고 싶고 아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무조건 집으로 가야 한다,빨리 집에 가서 내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보다 못한 힐랄이 같이 한국에 가자고 했다. 가족들과의 해후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힐랄은 열흘 후 사우디아라비아로 돌아갔다. 물론 나는 가지 않았다. 집이 너무 좋았다. 81년 드디어 자본금 1천만원에 '청우엔지니어링'을 강남구 논현동(당시 학동)에 설립,오폐수정화처리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의 청우네이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