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과 연말연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은 핵위기를 고조시키는데 여념이 없다. 그런데 1994년 핵위기 때와 다른 점이라면 위협수위를 높여가는 모습이 단계적이고 조절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10월 초 제임스 켈리(James Kelly) 특사의 방북 때 우라늄 핵폭탄 개발계획이 드러남으로써 북한 핵문제가 새 국면을 맞은 이후 김정일 정권이 보여 온 행보를 보면 그러하다. 우라늄 핵무기 프로그램으로 국제사회가 놀랐으나, 미국이 침착하게 관망세를 유지하자 북한도 함께 조용히 한달반 이상을 보냈다. 미국이 12월분 중유공급을 거부하자 이로 인한 '전력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핵시설을 재가동할 것이라고 응수했다. 이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핵동결 조치를 해제하며 감시카메라 및 봉인해체를 요구한다'는 편지까지 친절하게 보내 모종의 '절차'를 밟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대해 미국이 여전히 유감과 우려의 뜻을 표할 뿐 적극적인 협상의지를 보이지 않자, 22일 그 편지의 내용을 실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23일에는 폐(廢)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위한 재처리시설인 방사화학실험실에 대한 봉인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곧 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작업으로 돌입하는 과정이어서 이제 북한 핵문제가 심각한 정면대결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셋을 셀 때까지 북한체제 보장도 약속해 주고 경제지원도 확실히 해줘야 할 것이라 해놓고 '하나, 둘, 둘의 반, 둘의 반의 반…' 계속 헤아리고 있다. 핵은 북한과 미국간 담판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다. 북한은 체제생존을 위해 미국의 지원과 국제적 보장을 필요로 하고, 미국은 북한 핵 프로그램의 동결을 위해 가장 단호한 입장을 보이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평화적 해결에 대한 원칙을 북한측에 누차 확인해 주고 있긴 하지만, 미국기업의 직접투자금지, 수출신용제공금지 등 주요 경제제재 조치를 통해 북한경제를 꾸준히 압박하고 있다. 미국이 물리력을 동반한 '비외교적' 수단을 섣불리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극단적인 경우 한국을 전장터화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라크의 경우처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문 채택을 통한 외교.경제적 압박수위를 높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북한은 98년 이후만 해도 핵무기 개발에 필수적이며 핵실험 직전단계인 고성능 폭발실험을 70여차례 실시해 온 바 있다. 핵의 실질적 보유라는 '최종목표'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경제적인 비용으로 재래식 군사력의 열세를 만회하려는 이유도 있으나, 핵 이슈의 환기를 통해 내부단합을 고취하려는 의도도 내포돼 있다. 한국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의 장(場)으로 나오는 것이 살 길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적극적인 대북정책을 펼쳐야 한다. 포용정책기조와 핵사태의 평화적 해결은 함께 추진해야 할 목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무분별하고 굴종적인 포용은 대북지원의 명분도, 평화도 모두 잃게 할지 모른다. 핵문제의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해결을 전제로 한 협상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북한측에 인식시켜야 한다. 사태의 긴박성과 심각성은 한국과 미국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이 느껴야 한다는 점도 전해져야 한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의 전면적 폐기를 전제로 한 협상을 희망할 경우 협상의 모든 절차와 방식을 평화적이고 동등한 입장에서 진행할 것임도 천명해야 한다. 북한이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준다는 차원에서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되, 핵 폐기 약속에 대한 불이행이 있을 경우 이에 대한 대처 방안을 확고하게 합의해야 한다. 이 모든 원칙과 세부 실천지침이 부시 행정부와 긴밀하게 조율되어야 한다. 그래서 북한도, 미국도 서로 체면을 살리고 납득할 수 있는 타협안이 나와야 한다. 핵문제가 가닥을 잡아야 남북관계의 중심이 다시 설 수 있다. 북한이 마지막 셋을 세도록 방치하지 말자. < thkim02@mofat.go.kr > -----------------------------------------------------------------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