咸仁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21세기를 여는 첫 대통령으로 우리 국민은 50대 젊은 후보를 선택했다. 대통령 당선자에게 어떠한 기대를 전할 것인가 곰곰 생각하노라니,문득 '대통령에게 바랄 것이 달리 없는 사회야말로 가장 성숙하고 건강한 사회'라는 상념이 스쳐 지나간다. 굳이 정부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사회 질서를 평온하게 유지해갈 수 있는 지극히 합리적인 인간을 상정했던 무정부주의자의 마음처럼 말이다. 그렇긴 하나 대통령 당선자에게 하고픈 주문이 비교적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인 듯하다. 무엇보다 부정·부패가 불의의 이름으로 단죄되는 사회,원리 원칙이 공고히 지켜지는 사회,그리고 소신을 지킨 사람들이 손해보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가길 기대한다.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사회적 명망을 얻고,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부정·부패를 일삼는 무리들이 막강한 부를 축적하는 사회는 필히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우리의 발등을 찍을 것이다. 세계 각국이 무한경쟁 체제로 돌입한 오늘날 사회자본으로서의 '신뢰'야말로 최고의 경쟁력이자 최선의 자산임은 익히 알려져 있다. 지난 6월 온 국민을 열광케 했던 '히딩크 신드롬'의 교훈,기본원칙을 철저히 지킬 때 우리의 저력이 마음껏 발휘되었음을 기억할 일이다. 다음으로는 IMF 위기관리 이후 확대되고 있는 빈부 격차,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유감없이 위세를 떨친 지역주의,새로운 사회적 균열의 징후로 등장한 세대 간 긴장,그리고 '명백한 차별'로부터 '미묘한 차별'로 전환해가고 있는 남녀불평등 등 다양한 사회적 불평등을 조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공정한 시스템을 구축해 가길 희망한다. 사회가 점차 다원화되고 분화돼 가는 상황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는 불평등 구조는 이제 더 이상 대통령 개인의 탁월한 리더십이나 포용력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는 구조화된 불평등이든,압력단체간 이해관계의 충돌이든,합리적이고 공평한 룰을 토대로 운용의 묘를 살림으로써 불평등 해소의 실마리를 찾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이리라 생각한다. 특별히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예측불허의 드라마를 연출하며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한 '세대간 균열(divide)'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젊은 세대가 원하는 것은 진정 무엇인지,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함은 물론,세대갈등을 훌쩍 뛰어넘어 수명연장에 따른 세대공존의 과제를 풀어가야 할 의무 또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세번째,끝없는 구조조정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언제라도 닥쳐올 실업의 위협,평생에 걸쳐 건강한 삶을 보장받고 싶은 욕구,고령사회의 핵심 화두로 등장하고 있는 부양 부담 등을 고려할 때,개인의 생애주기 전반을 포괄하는 사회 안전망을 현실화하길 간절히 희망한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 정부가 간판으로 내세워왔던 '생산적 복지'의 한계를 적극 보완하고,수요자 눈 높이에 맞춘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함은 물론,사회적 약자들,곧 노인 여성 청소년을 위시하여 장애인 농민 탈북자 외국인노동자 등을 위한 제도적·정책적 차원의 배려를 기대해본다. 여성의 입장에서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출산율의 급격한 저하에 일조(一助)해 온 취업여성의 자녀양육 및 보육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절실함을 전하고 싶다. 양육 및 보육은 더 이상 여성들만의 책임도 아니요,가족이 전적으로 완수해야 할 의무도 아니다. 이는 사회적 차원에서 질 높은 미래세대를 양성하는 동시에 부양체계의 균형을 확보하는 과제와 직결되기에,국가가 앞장서고 여성 인력을 필요로 하는 기업이 힘을 합해 가족친화적 정책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펼쳐 나가야 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지금까지 구구절절 읊은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바람은 이미 대통령 선거 공약(公約)에 조목조목 명시되어 있다. '국민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당선자 스스로의 다짐이 립 서비스 차원의 공약(空約)에 머문 채,'혹시나' 했다가 '역시나'로 귀결되는 구태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pigley59@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