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사님에게서 한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남편은 꼼꼼한 성격이었으며,부인은 덜렁대는 구석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부부는 치약 사용방법부터 서로 달랐다. 치약튜브가 양철로 만들어졌던 시대였기 때문에 남편은 튜브의 끝을 눌러서 치약을 짜내 단정하게 사용했다. 그러나 부인은 튜브의 중간을 덥석 눌러 치약을 짜내 남편이 정성스럽게 만들어둔 튜브의 모양을 엉망으로 만들곤 했다. 남편은 엉망이 된 치약튜브를 부인에게 보여주면서 말다툼을 벌이곤 했으나,부인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아침마다 치약튜브 때문에 신경이 거슬리던 남편은 어느 날 자신이 치약을 사용한 뒤 튜브의 끝을 말아놓았다. 그러자 부인이 튜브의 중간을 눌러 사용해도 피해(?)가 최소화되어 다시 튜브의 끝부터 치약을 앞쪽으로 모아야 하는 불편이 없어졌다. 예상대로 부인이 치약을 쓰고 난 후에도 튜브의 모양이 그전처럼 완전히 망가지지 않은 것을 본 남편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며칠 후 남편은 부인도 명랑해져 있고,며칠 동안 바가지 한 번 긁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은 부인에게 왜 요즘은 기분이 좋으냐고 물었다. 부인은 대답했다. "당신 덕분이에요. 저는 치약을 시원스럽게 쿡 눌러 짜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당신이 저를 위해 치약튜브를 말아 놓아 저는 기분 좋게 눌러 짤 수 있게 됐어요. 저는 치약을 쓸 때마다 당신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답니다." 필자가 컴퓨터와 인연을 맺은 지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각자의 목소리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사실 각자 주장하는 이야기들은 일부 오해에서 비롯된 것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합리적이고 옳은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한쪽의 입장만 고려하다가는 다른 쪽이 피해를 보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각자 자기들의 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양쪽 모두에게 손해가 되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많다.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만 되풀이하는 것은 불평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이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해소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문제 해결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필자가 재미있게 읽은 책 중의 하나로 개빈 케네디(Gavin Kennedy)의 '모든 것은 협상 가능하다(Everything is negotiable!)'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 어느 호텔에 여장을 풀었는데,습도가 너무 높아 밤새 고생했다고 한다. 그는 아침이 되자마자 호텔 프런트로 달려가 종업원에게 호텔의 형편 없는 시설에 대해 마구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결국은 창문을 열어놓고 자라는 회답밖에는 얻을 수 없었다. 그 다음에야 그는 불평만을 늘어놓아 종업원을 방어적인 자세로 만들어 놓는 것보다는 자신의 불편한 점을 설명하고 다른 방으로 바꾸어달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가 프런트로 갔던 이유는 불평하기 위한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으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평보다는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고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눈앞의 이익에만 연연하고 불평만 하기보다 서로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서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시한다면,처음에 이야기한 부부의 경우처럼 모두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토론과 논쟁의 차이점은 전자가 상호 이해 속에서 서로 수긍할 수 있는 의견을 도출해내 가는 과정인 반면에,후자는 말 그대로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토론을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이며,상대방의 발전은 곧 나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cahn@ahnla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