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보험공사가 은행의 부실관련 소송 담당자들에 대한 문책을 검토하고 나선 것은 은행들의 소송 회피가 도(度)를 넘었다는 판단 때문이다. 특히 가장 많은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의 전현직 임직원들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액수가 다른 금융회사들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것으로 나타나는 등 형평성 문제까지 제기되고 있다. 상당수 은행들이 고의적으로 소송을 회피하거나 채권 가압류를 미루는 바람에 공적자금의 손실폭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점도 예보를 곤혹스럽게 하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공자금 회수 극대화를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강하게 일고 있다. ◆ 은행이 가장 소극적 지난 10월말까지 은행들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모두 85조9천억원에 달한다. 금융권에 투입된 공적자금 합계 1백57조1천억원의 54.6%에 이른다. 나머지 증권 투신 보험 신협 저축은행을 합친 것보다 17조원이 많다. 이에 비해 소송액수는 제주 조흥 경남 광주 제일 서울 우리 수협 농협을 합쳐 고작 4백52억원에 불과하다. 예보가 발견해 낸 부실책임액(귀책금액) 1조1백19억원의 4.4% 수준이다. 5개 퇴출은행을 합쳐도 6백80억원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다. 공적자금이 각각 2조4천억원, 8조1천억원 투입된 신협과 저축은행의 부실책임자에 대한 소송액수가 각각 3천5백40억원, 4천2백97억원인 것과 비교하면 은행들은 사실상 소송에 뜻이 없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게 예보의 시각이다. 은행중에도 공적자금이 가장 많이 들어간 제일은행은 예보가 2천6백29억원의 배상책임을 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송액은 1%에도 못미치는 23억원에 그쳤다. 이에 비해 대주주가 회사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 제주은행은 규명된 책임액의 60%에 이르는 30억원의 소송을 제기해 대조를 보였다. ◆ 부실 소송 유형 축협은 특정경제가중처벌법 위반으로 사법처리까지 받은 임원에 대해서도 내부 인사위 면책을 이유로 소송조차 제기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예보 관계자는 "축협에 신용불량업체의 수출환어음을 부당하게 매입함으로써 수백억원의 손실을 끼친 4명의 임직원에 대한 소송을 요구했으나 지난 2000년 자체 변상심의 결과를 핑계로 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농협과 통합되기 직전 자체 인사위에서 이들에 대한 책임면제를 결정하는 편법까지 동원했다고 예보는 전했다. 예보는 이들에 대해 즉각 소송을 진행할 것을 통보했다. 은행들이 부실책임자의 재산 가압류를 미루다 별도의 소송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도 적지않게 발생하고 있다. A은행은 지난 2월 예보로부터 수백억원의 배상책임이 있는 전직 은행장 K씨의 재산내역을 통보받았다. 물론 즉각적인 가압류 요청도 뒤따랐다. 그러나 은행이 채권보전조치를 미루는 사이 K씨는 경기도 포천군 소재 임야 1백평을 제3자에게 팔아버렸다. B은행도 90억원의 책임이 있는 전직 상무 N씨에 대해 채권보전조치를 미루다 4월중 서울 강동구 소재 33평형 아파트가 팔려버린 것으로 드러났다. 예보는 이들이 처분한 재산에 대해서는 은행으로 하여금 사해행위 취소소송을 통해 원상회복시켜 놓도록 요구했다고 밝혔다. C은행은 예보로부터 지난 7월말 10여명의 부실책임자들에 대한 소송통보를 받았지만 이를 미루고 미루다 두 달이 지난 10월초에 전직 은행장 2명에 대해서만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가 예보로부터 질책을 받기도 했다. D은행은 전직 은행장 2명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 재무구조가 불량한 10개 업체에 대해 돈을 빌려준 사실이 드러났지만 3개 업체에 대한 여신 부당취급건에 대해서만 소송을 제기하고 증빙서류도 제대로 구비하지 않다가 예보로부터 보완조치를 요구받았다. ◆ '불똥 튈라' 소송 꺼려 은행들이 다른 금융사들에 비해 소송에 소극적인 이유는 여러가지로 꼽힌다. 정서적으로는 길게는 수십년동안 함께 일해온 선후배들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또 은행의 특성상 부실여신 등에 대해 치밀하게 책임을 물을 경우 그 책임이 현직에 있는 임원들에게까지 돌아올 가능성이 있어 소송에 적극적일 수 없다는게 예보의 관측이다. 이와 함께 은행들은 과거 '부실회사들에 대한 여신 결정'의 상당부분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는 점과 소송의 실효성이 별로 없다는 점을 들어 소송을 기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