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이문열의 '칼레파 타 칼라'라는 중편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고대 희랍을 무대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가 왜 어려운지를 우화 형식으로 그린 소설이었다. 소설 내용보다도 더 인상적으로 각인된 것은 소설 제목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제목은 '좋은 일은 이루어지기 어렵다'라는 뜻의 희랍어라고 한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요즘 필자의 머리 속에는 이 제목이 마치 주문처럼 맴돌곤 한다. 후보들이 내건 장밋빛 공약들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그중에도 필자가 가장 미심쩍어 하는 공약은 행정규제를 개혁하겠다는 공약이다. 언제부턴가 규제완화 공약은 대통령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선거 공약의 단골 메뉴라는 사실 자체가 이 공약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필자의 기억으로 규제완화가 경제정책의 핵심 이슈가 되기 시작한 것은 노태우 정권 말기였다. 당시 수석경제부처였던 경제기획원 관리들은 디레귤레이션(Deregulation)을 입에 달고 다녔다. YS 정부가 들어서고 나선 규제완화가 경제정책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당시 모 부총리는 "규제완화가 아니라 '규제파괴'를 하겠다"며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수사학적 기교에 불과했다. 한 쪽에서 규제가 풀리면 다른 쪽에서 새로운 규제들이 만들어지곤 했다. DJ정부에서는 '규제개혁위원회'라는 기구가 만들어졌다. 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1998년 4월 발족 당시 1만4천여건에 달했던 행정규제가 15일 현재 7천4백건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계량적 실적에도 불구하고 DJ정부의 규제개혁 역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규제의 건수를 줄이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규제의 일관성 부족'이라는 보다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냉온탕식 부동산 정책을 들 수 있다. 아파트 거래와 관련된 규제는 하도 급작스레 바뀌어 부동산 중개업자들조차도 헷갈릴 정도다. 한때 신용카드사들에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리게 했던 신용카드 장려 정책도 어느 순간 갑자기 규제일변도로 돌변했다. 이보다 앞서 재벌기업들에 대한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폐지했다가 1년여 만에 부활시킨 것은 '냉온탕식 규제'의 예고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업이나 가계 등 민간 경제주체들에 이같은 규제의 일관성 부족은 '폴리시 리스크' 또는 '레귤레이션 리스크'로 작용한다. 규제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몰라 경제활동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가령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가계대출 문제만 해도 개인들이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전방위적인 규제가 가해짐으로써 신용불량사태를 재촉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한때 국내 신용카드사 인수를 추진했던 외국 금융사들은 최근의 신용카드 규제정책을 지켜보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프리 존스 암참(AMCHAM.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이 얼마전 기자회견에서 '경제정책의 일관성 부족'을 한국경제의 3대 문제점중 하나로 지적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라고 이해된다. 어찌 됐거나 이번 대선에서도 규제개혁은 또다시 공약 메뉴판에 올랐다. 이회창 후보는 "집권시 규제와의 전쟁을 선포하겠다"며 '규제일몰제' 도입 등을 약속했다. 노무현 후보도 인.허가 등 기업관련 규제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어느 후보가 당선되든 부디 이번 만큼은 수사학적 기교나 규제 건수 줄이기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5년 뒤에 또다시 '칼레파 타 칼라'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말이다. < limhyuck@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