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yang@mail.kitca.or.kr 1997년 환란의 소용돌이에서 12월18일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금년에도 국내외적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선거를 며칠 앞두고 있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니 5년전 그 숨막히던 상황을 반추해 본다. 개각 이틀후인 11월21일 신임 부총리는 IMF구제금융신청을 발표했다. 12월3일 IMF는 총 2백10억달러에 달하는 스탠바이협약의 합의와 1차 지원금 제공을 제시했다. 10일에는 환란의 주범인 종금사중 9개사의 영업정지조치가 내려졌고 수차에 걸쳐 종합경제대책이 발표됐다. 그러나 한국의 신용평가등급은 몇차례 강등돼 정크본드수준으로 추락했고,국제금융시장에서는 한국부도 우려가 심각해져 마침내 성탄절 전날에는 주가지수가 351,환율이 2천원까지 폭락했다. 12월 중순경 미 국가안보회의는 한국구제방침을 결정하고 미정부와 미은행들의 주도아래 연말 뉴욕에서 열린 채권은행장회의는 한국외채 2백40억달러 상당을 만기연장하기로 결의했다. 97년은 국제투기꾼들의 극성 때문에 태국 인도네시아 홍콩 대만이 차례로 항복했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고 자본거래규제를 발표했고 중국은 위안화 가치의 고수방침을 밝혀 두 나라는 아시아권 환란을 비켜갔다. 일본은 재빨리 한국에서 1백50억달러를 회수해 갔으나 G7회담 이후 엔화가치는 추락을 계속하고,야마이치증권은 파산을 선언했다. 한국은 부채위주의 고도성장 30년의 폐해가 누적돼 97년초 한보부도에 이어 삼미 기아 진로 대농 등이 줄줄이 부도사태에 들어갔다. 연중 내내 9용(龍)이 출전한 대선경쟁속에 금융당국은 금융개혁법 통과에 매달리고 있었으니 모든 조기경보장치들이 마비상태였다. 환란을 겪고 나서 원인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가 많이 나왔고,그후의 성공적 정책들 덕택에 한국은 위기극복과 함께 세계경제사에서 '또하나의 기적'이란 말을 듣게 됐다. 그러나 96∼97년 당시의 화려한 구호들-세계화,자본자유화,1만달러소득,OECD선진국,환율안정 등이 당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을 현혹시켰고 많은 정책들을 왜곡시켰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고명(高名)한 IMF도 97년 9월 홍콩연차총회에서는 아시아의 발전을 찬양했고,10월 보고서에서는 "한국경제는 펀더멘털(fundamental)이 좋다"고 칭찬했으니 이 또한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