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통화정책가들은 디플레라는 새로운 적이 아니라 인플레라는 구적(舊敵)과 아직도 싸우고 있다. 그러나 지금 시급한 것은 전세계가 리플레(reflation·통화팽창)정책을 통해 디플레이션을 막는 일이다. 중국과 다른 동아시아국가 등 신흥시장국가들이 글로벌 무역체제에 편입된 이후 디플레 압력은 매우 커졌다. 신흥시장국가들의 수출급증은 선진국가들에 물가하락 압력을 가하고 있다. 미국 및 유럽 기업과 가계는 자산가격 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움직인다. 미국과 유럽의 경제성장률은 지난 2년간 부진했고,일본경제는 여전히 불황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디플레는 경제에 크나큰 짐이다. 디플레는 기업과 가계의 실질 빚을 늘리고 금융시스템의 안정도 해친다. 무엇보다 재정적자가 많은 나라들은 디플레 탓에 경기회복을 위한 재정정책을 쓰기가 어려워진다. 한 국가가 일단 디플레 늪에 빠지면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경제를 구해낼 수 없다. 특히 일본처럼 금융부문이 상처를 입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같은 경기침체에서 벗어나려면 리플레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10여년 전 일본경제 버블이 꺼진 후 일본중앙은행은 너무 늦게 통화확대로 정책방향을 바꾸었다. 이 때문에 일본경제를 되살리기는커녕 디플레이션 불황을 야기했다. 이같은 쓰라린 실패는 금리조정과 같은 전통적인 수단으로는 디플레를 퇴치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낮고 안정적인 인플레는 모든 중앙은행들이 바라는 바다. 그러나 인플레 목표치를 너무 낮게 잡을 경우 구조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기존 상품의 품질향상 및 신상품 출시는 물가지수에 아주 천천히 반영된다. 그 결과 실제 인플레율은 물가지수보다 1~2%포인트 낮을 수 있다. 따라서 중앙은행은 인플레율이 마이너스로 떨어지는 위험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즉 적정한 인플레 목표치를 설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플레 억제 목표치는 디플레 위험을 최소화하는 수준에서 결정돼야 한다. 유럽중앙은행은 연간 인플레 억제목표치를 2~3%로 잡을 수 있지만,일본중앙은행은 이보다 높이 설정해야 한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최근 금리인하조치는 경기회복 지연 및 디플레 위험을 사전에 막기 위한 선제공격이다. 유럽중앙은행의 통화확대는 경기 및 인플레 둔화에 비춰볼 때 바람직한 조치다. 이같은 범세계적인 리플레 정책에 맞춰 일본중앙은행은 혁신적이며 비전통적인 디플레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이는 인플레 목표치를 3%로 설정해 통화공급을 꾸준히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미·일·유럽이 동시에 리플레 정책을 시행하면 달러·엔·유로화 환율도 별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이들 선진권과 함께 리플레에 나서야 할 나라는 높은 경제성장률에도 불구하고 물가가 떨어지고 있는 중국이다. 중국은 지금 수출확대와 국내 물가하락,달러화에 고정된 위안화 환율 등을 통해 전세계에 디플레를 수출하고 있다. 중국이 더 이상 디플레 수출국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국내 물가하락세를 막든지,위안화를 평가절상해야 한다. 이 중 위안화 평가절상이 더 힘든 선택이라면 중국정부는 선진국들의 리플레 대열에 동참해야 한다. 이는 세계최대 신흥시장국으로서 중국이 세계경제 안정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임무다. 정리=이정훈 기자 leehoon@hankyung.com -------------------------------------------------------------- 이 글은 일본 재무성의 구로다 하루히코 차관과 가와이 마사히로 부차관이 파이낸셜타임스에 공동기고한 'Time for a switch to global reflation'을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