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새 아가/강 건너 저 밭을 봐라/저게 저렇게 하찮게 생겼어도/저게 나다/저 밭이 내 평생이니라/저 밭에/내 피와 땀과 눈물과 한숨과/곡식 무성함의 기쁨과 설레임과/내 손톱 발톱이 범벅되어 있느니라/ (김용택의 '밭') 우리 농촌에서 어린 아가를 보기는 어렵다. 시아버지가 '저 논밭이 나다'고 말해 줄 새 아가는 더욱 보기 어렵다. '국민의 정부'는 농민이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보람으로 느낄 수 있도록 '농업인을 위한,농업인이 주인이 되는,농업인과 함께 하는 농업정책'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출범초에 약속했다. 이 공약이 지켜졌다고 생각하는 농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 대선후보들도 농업을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만들고 농촌을 살리겠다고 공약하고 있다. 이런 공약이 빛 좋은 개살구라고 생각하는 농민들은 최근 대규모 집회를 통해 한숨과 분노를 토해냈다. 우루과이라운드가 타결돼 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는 농산물가격지지정책을 금하는 대신,농업의 다원적 기능에 대한 보조,낙후지역 농민에 대한 소득손실 보전 등의 '직접지불제'를 허용했다. 쌀이 갖는 중요성을 감안해 최소물량을 수입한다는 전제하에 우리나라는 10년간,일본은 6년간 쌀시장 개방을 유예받았다. 개혁에 둔하다는 일본은 1995년에 바로 쌀 수매제도를 포기했다. 이어 유리한 시기에 높은 관세를 매겨 쌀 수입 충격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때 열자는 판단으로 앞당겨 쌀시장을 개방했다. 우리나라는 앞당겨 쌀시장을 개방할 수는 없을 망정,수매가격을 낮추고 수매량을 줄이면서 직접지불제를 확대해 나가는 방향을 잡아야 했다. 이를 외면했기 때문에 쌀 과잉재고와 국내외 쌀 가격차 확대로 구조조정이 더 어렵게 됐다. 어려운 때일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어려운 농업·농민·농촌문제와 관련해 국민 모두가 공유해야 할 기본명제를 반추해 본다. 첫째,오늘날 농업을 보호하는 나라는 거의 선진국인 바,우리나라도 농업의 핵심부분을 보호해야 한다는 점이다. 환경친화적이고 안정적인 농업과,이를 바탕으로 한 풍요로운 농촌이 21세기 선진국의 모습이다. 둘째,농업을 보호하되 국제규범에 맞게 보호해야 한다는 점이다. '저 논밭이 내 평생'인 농민들은 피와 땀에 상응하는 후한 쌀값을 원한다. 그러나 가격지지정책은 시장기능과 무역을 왜곡한다는 이유로 금하는 추세이니 어쩔 것인가? 국제규범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직접지불제를 선진국 수준 이상으로 활용하는 것이 순리다. 평생 논밭에서 '손톱 발톱이 범벅된'고령농민에게 사회복지,국민화합 차원에서 특별한 직접지불제의 배려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셋째,농촌을 쾌적한 삶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국민경제 차원에서 긴요하다. 주5일 근무제가 확대되고 있다. 국민 대부분에게 농촌은 마음의 고향이다.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창을 낸 전원주택'을 찾고 있다. 정부가 농촌의 하부구조를 갖추는 투자를 과감히 할수록 농촌이 휴양·관광·문화의 장으로 금세 바뀌고,국민들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넷째,우리 농민들이 신뢰받는 무공해농산물 생산자가 돼야 한다는 점이다. 중국 농산물과 가격으로 경쟁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맛과 건강기능성과,특히 무공해로 얼마든지 경쟁할 수 있다. 김용택 시인이 노래하는 '논두렁은 비뚤어졌어도/농사는 빤듯이 짓는/농군들'처럼 우리 농민들이 '무공해 농사를 빤듯이'지어야 한다. 우리 농업의 활로와 국민의 건강이 무공해 농업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농업 보호와 발전의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2004년말까지 재협상을 마쳐야 하는 쌀 개방 문제에 대해 정부 일각에서는 개방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반면,농민단체는 개방결사반대의 입장이다. 양쪽 모두 일리가 있고 문제도 있다. 결국 부대조건이 뭐냐에 달려 있다. '죽어도 이것이어야 한다'는 입장은 협상에서 자칫 큰 손해를 본다. 양쪽의 가능성을 다 열어 놓고,농민들의 쌀 시장 개방반대 시위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면서 최선의 부대조건으로 한쪽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위기의 농업은 동시에 기회의 농업이다. ksahn@c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