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위기가 발생한지 5년이 지난 지금 이 위기가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었는지,'역사가 준 선물'이었는지를 생각해 볼 때다. 지난 해 8월 IMF에서 빌린 돈을 다 갚으면서 김대중 대통령은 IMF 극복을 공식 확인한 바 있다. 또 그 동안 우리 사회 스스로의 문제인식과 실천 능력에 비추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개혁과제들이 위기 극복과정에서 추진돼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경제는 약간의 대내외 환경 악화에도 근본이 흔들리며 제2의 위기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어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해 지난 위기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자문해 보게 된다. 외환위기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본인식이나 대응방법은 최소한의 '지적인 사회'에 기대될 수 있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위기발생의 배경과 원인을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구조적으로 밝히려는 국가적 노력이 전혀 없었고,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정부차원의 제대로 된 보고서 하나 나온 적이 없다. 외환위기 발생의 책임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는 계층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집권세력은 일부 관료와 기업만을 희생양으로 삼고,정권유지나 인기 관리에 필요한 정치인 노동자 농민 언론 각급 지식인 등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이 모두에게 책임의식을 불러일으켜야 개혁에 동참할 터인데,'스탠드의 구경꾼'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하기야 국가지도자가 스스로의 책임을 인정하는 말을 한 적이 한번도 없는 데 어떤 도덕적 기반을 가지고 온 국민의 책임의식을 논할 수 있을까? 위기 규명을 위해 동원된 감사원의 특감,검찰의 수사와 기소,국회의 청문회는 그 수순이 잘못됐을 뿐만 아니라,짜여진 각본에 따라 집권자 의도에 맞는 연출만 함으로써 진실규명은 포기된 채 국력낭비의 장이 되고 말았다. 국가기관이 '해야 할 일은 안하고,안해야 할 일은 한'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동서고금(東西古今)에 유례 없는,정책판단의 당부를 가리는 소위 '환란 재판'에서 항소심도 검찰의 기소 자체가 잘못됐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외환위기와 관련한 기소항목 전부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사법부에 의해 이 나라에 '죄형법정주의'와 '증거재판의 원칙'이 살아있다는 것이 확인됐다는 점에서 다행이나,사안의 성격상 외환위기의 모든 내용을 사법심사가 밝히는 데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재판 결과에 접한 일부 국민들이 '그러면 누가 주범이란 말인가'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 것은,위기를 정치적 이해(利害)와 비이성적인 국민정서에 영합하는 기회로 이용함으로써 국민 대다수의 외환위기에 대한 인식능력을 단세포 수준으로 떨어뜨린 정부와,국민에 대한 교육기능을 부분적으로 포기한 언론과 지식인사회 때문으로 본다. IMF 위기는 외형상은 외화유동성 위기로 닥쳐왔다. 하지만 본질은 세계경제의 대전환기에 그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이미 효율성이 다한 정부주도 고성장주의와 기업들의 팽창욕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운용시스템을 고수하다가 국제경제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어 발생한 우리 경제의 구조적 위기다. 그러나 위기 극복과 관련한 경제정책의 기조는,위기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과는 달리,경기부양에 의해서라도 '경제가 잘 된다'는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전달하고,'위기극복 조기 달성'을 과시하는 인기 영합적 방식이었다. 그래서 일관성 있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개혁정책의 효과는 원천적으로 제약될 수밖에 없었고,국민들에게 더 이상 개혁과정에서의 불가피한 고통의 감내(堪耐)를 요구할 설득 논리를 정부 스스로 내버렸다. 성공적이라고 자찬하는 4대 부문의 구조개혁도,가장 우선했어야 할 공공부문과 노사부문의 개혁은 오히려 후퇴한 측면이 많고,결과적으로 기업과 금융부문 개혁까지 발목이 잡히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5년 전 오늘,IMF 외환위기 발생 직전 공직을 사임한 이후,단 하루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필자는 이 위기로부터 제대로 된 교훈을 우리 국가 사회가 얻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ihkim@shinkim.com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