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서울에서 황금빛 고운 은행잎을 보기 힘들 것 같다. 은행잎이 제 색깔을 내려면 가을 날씨가 한동안 지속돼야 하는데 갑자기 한파가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기온이 떨어지면 뿌리로부터 잎으로 올라가는 수분이 줄어든다. 은행잎이 노란색을 띠려면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수분을 공급받으며 동화작용을 일으켜 황색소를 생산할 수 있는 기간이 필요하다. 올해처럼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 뿌리가 수분 공급을 차단해버려 미처 색깔을 내기도 전에 낙엽이 지게 된다. 자연의 순리를 얻지 못한 은행잎은 이처럼 안쓰러운 모습으로 길바닥에 나뒹굴게 되는 것이다. 요즘 서울 하늘 아래 은행잎을 보노라면 우리 정당들의 퇴색되어 가는 정체성을 보는 것 같다. 대선이 눈앞에 다가오자 갑자기 경직돼 '원칙'과 '순리'는 없고 '정치9단'들이 즐기던 변칙과 현란한 기교가 판을 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 사이의 후보단일화 움직임이다. 정당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집권이고,민심이 단일화를 요구한다면 정치적 결단을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하지만 후보단일화의 전제는 후보들이 지향하는 이념이 유사해야 하고 지지자들도 유사점을 인정해야 하는 게 기본인데 그렇지 못한 듯 하다. 우리는 정당의 정책을 구분할 때 근로자·서민의 편에 서는지 기업·유산층의 편에 서는지부터 따져온지 오래다. 유권자들은 노 후보와 정 후보가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크게 다른 것으로 인식해왔다. 따라서 두 후보 가운데 누구를 중심으로 단일화하느냐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에 앞서 어떠한 면에서 닮은 점이 있는지 지지자들에게 설명하는 게 도리에 맞는 일이다. 그도 아니면 그동안 그들이 추구해온 가치와 원칙을 어떻게 조화롭게 지켜나갈 것인지 복안이라도 밝혀야 신뢰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합칠 경우 대선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는 것 못지 않게 국민들에게 제공할 '정치서비스'가 어떻게 개선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도 정치지도자의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본질은 제쳐두고 단일화 방식의 유불리부터 따지고 보니 계산만 복잡해질 뿐이다. 민주당을 탈당한 후보단일화협의회 소속의원들의 색깔은 더욱 모호하다. 탈당이라는 초강수까지 구사하면서 단일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정작 후보단일화가 추구하는 이념적 비전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탈당한 지 1주일도 못돼 그들이 내걸었던 명분과는 달리 '제3신당' 운운하고 있다. 정책과 이념이 아니라 '반창(반 이회창 후보)' '비노(비 노무현 후보)'식으로 특정인물을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식의 이합집산으로 비쳐져 우리 정치사의 시계바늘을 20세기로 되돌려 놓으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후보는 지난 97년 대선때부터 '3김시대'의 계파정치와 '세몰이'식 낡은 정치구도를 타파하고 새로운 정치를 선보이겠다고 약속해왔다. 하지만 원내 의석 과반수를 훨씬 넘긴 지금도 '세몰이'는 지속되고 있다. 노란빛깔의 은행잎이 어찌 설악산이나 내장산의 단풍만큼 고울 수 있겠는가. 하지만 때에 따라선 단풍보다 소중할 때가 있고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단풍을 찾아나설 틈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심의 황금빛 은행잎은 늦가을 마음의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유일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은행잎이 제 색깔을 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soosu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