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 회장은 대한생명 인수가 결정된 직후 대생의 사외이사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영입하겠다고 밝혔다. 197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키신저 전 장관은 국제 정치계의 거물이어서 그가 사외이사에 오른다는 것 자체만으로 화제거리였다. 그는 이미 한화그룹 경영고문을 맡고 있으며 김승연 한화 회장이 주도해 설립한 한.미교류협의회 이사로도 등재돼 있다. 최근 들어 이처럼 사외이사나 자문역에 외국인을 임명하는 국내 기업들이 늘고 있다. 국내 기업에 대한 외국계 기업의 지분 참여가 활발해지면서 외국 임원들의 수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한국상장사협의회가 지난 7월 상장회사의 사외이사 현황을 조사한 결과 전체 1천3백42명 사외이사 중 외국인은 61명으로 전체의 4.5%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서류상 등록돼 있지 않은 자문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외국인들의 수까지 합치면 현재 국내 기업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인 임원 수는 줄잡아 1백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외국인 임원이 국내 기업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국내 기업이 글로벌화 돼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만큼 이들의 역할도 만만치 않다. 해외를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에서 큰 몫을 해내는 한편 독보적인 기술 및 노하우로 해당 기업의 성장에 주춧돌 역할도 해내고 있다.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해외 로비에도 한 몫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1월 데이비드 스틸 미래전략그룹 소속 해외전략 고문을 상무보로 승진시켰다. 삼성전자 최초의 외국인 임원인 스틸 상무보는 66년생으로 옥스포드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시카고대에서 MBA를 마치고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디지털미디어 총괄에서 신규사업을 맡고 있는 그는 사내에서 "천재"로 통한다. 물리학과 경영학을 동시에 전공한데다 학업 성적이 줄곧 최우등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삼성 미래전략그룹으로 입사한 뒤 3년4개월 동안 14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성과 평가에서 "최우수 외국인 스태프"로 평가받기도 했다. 외국인이면서도 삼성에 대한 애착심이 누구보다 강한 "삼성맨"으로 평가를 받는 그는 석.박사급들이 기피하는 제조현장 근무를 자원하는 등 조직 적응력도 뛰어나다. 우리말 실력도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을 정도다. LG필립스LCD의 CFO(최고재무담당)인 란 위라하디락사 씨는 네덜란드인이다. 90년 필립스에 첫발을 내딛은 그는 그리스 말레이시아 지사의 CFO를 역임했고 지난99년 7월 LG전자와 필립스의 합작법인인 LG필립스LCD가 출범하면서 공동대표 이사 겸 CFO로 한국 근무를 시작했다. 이 회사 CMO(최고마케팅담당)인 미국인 브루스 버커프 부사장은 생물학 물리학 문학 철학 등 여러 방면에서 학위를 취득한 재주꾼. 필립스 평면 디스플레이 시스템(FDS)과 AT&T 등에서 마케팅 분야의 경력을 쌓아왔다. 얼마전 둘째 아이의 백일잔치에는 평소 자주 타고 다니는 모범택시의 기사를 부인과 함께 초청할 만큼 정이 많다고. 때로는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면서 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CTO(최고기술담당자)인 부디만 사스트라 부사장은 인도네시아 출신 화교다. 네덜란드에서 유학하면서 필립스와 인연을 맺게 된 그는 가끔씩 동료들과 재즈바를 찾는 자상한 상사다. 풍산은 방위산업체라는 업종에 걸맞게 전 주한미군사령관 토머스 슈워츠 장군을 얼마전 특별상담역으로 영입했다. 슈워츠 장군은 풍산 방위산업부문(총포탄약제조)의 중장기 사업전략과 해외마케팅,안전관리 분야에서 전문적인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맡게 된다. 슈워츠 장군을 상담역으로 추천한 이는 류진 풍산 회장. 류 회장은 슈워츠 장군이 주한미군사령관 재임 당시 공식석상에서 몇 차례 인사를 나누면서 친분을 쌓았다. 류 회장은 재래식무기 감소 등 방위산업구조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이 분야의 연구개발과 해외수출 전략을 점검할 적임자를 찾던 차에 그를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현대자동차의 스티브 모건 전무는 다임러크라이슬러와의 전략적 제휴 업무 등 현대자동차의 해외사업 관리부문을 맡고 있는 현대차내 유일한 외국인 임원이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뉴욕에서 변호사 활동을 한 그는 지난 99년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씨티은행 메릴린치 등 금융권에서 경험을 쌓다가 99년 금강개발 이사로 현대그룹에 입사한 뒤 2000년 현대자동차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2년동안 1백15회나 해외출장을 다녀오는 등 현대자동차의 글로벌 마케팅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부인은 일본 근무 중 만난 한국인. 이탈리아인인 그는 영어는 물론이고 한국어 독일어 일본어도 능숙하게 구사한다. 김미리 기자 mi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