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뒤에서 외국인이 "어이 밥(Bob)"하고 불러 뒤돌아봤는데 다른 사람이 대답하더군요.영문이름이 또 하나의 이름으로 무의식속에 자리잡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장병우 LG오티스 사장은 미국 출장길에서 가끔 이런 경험을 한단다. 80년 LG전자(옛 금성사) 북미사업담당 과장으로 근무할 때 외국인들이 발음하고 기억하기 쉽도록 한글 이름과 비슷한 영문 이름을 지었는데 그 정도로 익숙해졌다는 얘기다. 이처럼 영문이름을 가진 CEO들이 늘어나고 있다. 해외사업상 외국 상대방과의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이기도 하고 사적인 자리에서 애칭으로 불리는 이름이기도 하다. CEO들의 영문 이름이 가지각색인만큼 얽키고 설킨 사연 역시 다채롭다. 구자홍 LG전자 부회장의 영문이름은 "존 쿠(John Koo)"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구 부회장은 "C.H.Koo"라는 이니셜만 썼다. 73년 LG상사에 입사해 홍콩과 싱가포르지사에서 근무할 적에도 그랬다. 그런데 87년 LG전자(옛 금성사) 해외사업본부 상무로 본사에 들어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당시 구자학 LG전자 회장이 같은 이니셜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감했다. 급기야 구 부회장은 LG칼텍스정유 관계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회장과 영문 이니셜이 같아 곤란을 겪고 있다"면서 농담 삼아 고충을 털어놓았다. 혀를 차던 동석인들이 한글 이름 자홍과 발음이 비슷한 "존(John)"이 어떻겠느냐고 추천해 지금껏 사용하고 있다. 구 부회장은 이메일 ID도 "johnkoo"라고 쓰고 있다. 류진 풍산 회장은 해외에서 "진 로이 류(Jin Roy Ryu)"로 불리운다. 서울대 영문과 출신에 미국 다트머스대 경영학석사(MBA)인 그는 1년중 3분2이상을 해외출장으로 보내다 보니 영문 이름이 유명해진 것이다. 특히 류 회장은 "로이 류"로 미국 정계와 두터운 친분을 쌓고 있다. 콜린 파월 미 국무부 장관의 자서전을 한국어로 번역,출간했을 정도다. 또 부친인 고 류찬우 풍산금속 회장이 방위산업을 통해 미국 군부 및 공화당과 깊은 인연을 맺어놓고 있던 터라 조지 부시 대통령 가문과 교류를 하게 됐고 그들에게는 "로이"로 친근감을 더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양인모 삼성엔지니어링 사장의 영문이름은 "이안 양(Ian Yang)"이다. 74년 삼성물산 뉴욕지점 근무시절 영국계 미국 고객이 작명해준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007 제임스 본드" 영화의 모태가 된 영국 첩보소설의 작가,이안 플레밍(Ian Flemming)과 이름이 같아 외국 고객들 머리에 쏙쏙 기억된단다. 해외에서 플랜트 공사를 수주할 때나 관련사업상 주한 외국대사들을 만나 이미지 관리할 때 더욱 인상적이라는 것.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과 최태원 SK(주) 회장은 유학시절 영문이름을 얻었다. 손 부회장은 "존 손(John B. D. Sohn)",최 부회장은 "안토니 최(Anthony Chey)"다. 안토니 최는 미국 시카고대에서 유학을 시작한 83년부터 사용됐다. 한글이름을 발음하기 힘들어 하는 친구들을 위해서였다. 이름 때문에 생기는 에피소드도 있다. 장병우 LG오티스 사장이 84년 마케팅담당 부사장으로 부임했 때의 일이다. 뉴욕타임즈가 새로 부임한 사실을 보도했는데 "Bob Jang"이 아닌 "Robert Jang"으로 표기를 하는 바람에 졸지에 "미아"가 될뻔했다. "밥"은 다름 아닌 "로버트"의 애칭. 뉴욕타임즈는 지면에 애칭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밥"이라는 이름 대신 "로버트"라는 이름을 달아놓았던 것이다. 김홍열 기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