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맨손 안으로 기어들 듯 서늘하고도 청명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나이의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노라면 계절을 보는 시선에 너그러운 불빛을 켜게 된다. 아름다움을 보는 폭이 한결 넓어진다는 뜻일 게다. 가을은 그래서 '보는 계절'이면서 '생각하는 계절'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가을이라는 계절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갖고 있는 교훈은 '가을에 독서를 해야 한다'는 막연한 부담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그저 막연할 뿐이지 누가 가을이 왔기 때문에 독서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 지 궁금하다. 특히 부담으로 느끼는 사람조차 있기는 있는 지 모를 일이다. 맨 처음 누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했는 지 잘 알 수 없는 일이지만,가을에만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면 '독서도 사계절 다 밥 먹듯 해야 하는 일'이라고 처음부터 교육시켰더라면 우리나라 독서율이 지금보다 더 높았을 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본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동네 도서관이나 구청 앞에 큰 글씨로 펄럭이고 있는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플래카드는 마치 애걸하는 모습으로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날 좀 봐줘요,날 좀 봐줘요'하면서 애원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독서의 계절이 뭐 수재민 구호품 걷듯이 그렇게 저자세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해서 펄럭이며 단 한사람에게라도 눈에 띄어 단 한줄의 독서라도 하게 한다면 문화담당 직원들이 의무를 다한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은 그런 플래카드에 비치는 글씨를 한장 떨어지는 낙엽보다 더 마음에 남기지 않는다. 나는 적어도 그걸 보고 독서하고 싶다는 자극을 받았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하는 것일까. 뻔한 대답일 지 모른다. 늘 하는 일이니까. 그런 걸 펄럭이는 것으로 뭘 좀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고,분위기 조성으로 플래카드는 안성맞춤일지 모른다. 효과는 늘 별 문제다. 사실 서점의 통계로 보면 가을은 가장 책이 안 팔리는 계절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같이 부존자원이 없는 나라는 책을 읽음으로써 키워지는 인간자원에 사실 상당한 투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가을에는 '단풍구경 계절'이라는 것이 더 상식적이고 더 대표적 내용이면서,'독서의 계절'은 그 내용 위에 튀김옷처럼 발라 놓은 것인 지 모른다. 물론 단풍도 봐야 한다. 이렇듯 강조하는 부분과 내용이 다른 것을 가장 많이 보는 것이 정치판일지 모른다. 어찌 한두번 보고 살아 온 것이겠는가. 많은 것에서 개혁이 일어나고 세상은 이미 달라졌다고 보아진다. 그런데 그 발전적 변화에 그 어떤 변화도 볼 수 없는 곳이 정치판 아닐까. 말만 무성하고 겉만 그럴 듯한 정치인들의 말을 들으면 이제 속이 느글느글해서,자부심으로 붙들고 있는 이 나라에 대한 희망마저 내팽개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국회의원들의 당적 이동을 가을의 '철새이동'으로 비유하지만 잘 모르는 일이다. 이당 저당 모두 분명한 색채의 이념이 없으므로 이 땅에선 어느 당에 가더라도 도덕적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인 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나라나 국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독서의 계절처럼 플래카드를 내거는 것이고,실질적 내용은 '내가 살아남는 곳' 또는 '조금 더 이익이 돌아오는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나를 밀어 준 유권자의 시선은 결국 또 다른 말로 광을 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지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모두 '너 때문에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나 때문에 사는 것'이 인간의 본성 아니겠는가.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는 의미망 속에 반드시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분명한 가치부여의 관점이 호응을 얻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 가을, 다만 독서의 계절처럼 강조하는 부분과 실상이 너무 멀어지지 않고 가깝게 끌어당기는 사회의 알찬 속내 속에서 우리 모두 살아 보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ahr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