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들은 돈 벌어 최소한만 쓰고 최대한 저축한다. 은행은 이 돈을 기업에 빌려준다. 기업은 이자를 갚고 개인의 저축금은 늘어난다. 성장기 한국 경제는 이같은 과정에 충실했다. 높은 저축성향(저축률)을 자랑했고 그 결과 고성장 기반도 마련됐다.' 지금까지 경제와 관련된 학교교육,국민교육의 기초적인 설명이나 이론은 이랬다. 그러나 최근 가계의 과감한 금융차입과 적극적인 소비 행태를 보면 이 설명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할 지경이다. '기업,특히 우량기업은 한결같이 빌린 돈을 갚으려 애쓴다. 자금의 주요 수요처인 대기업이 돈 빌리기를 꺼리니 은행에는 돈이 넘쳐난다. 그러나 생산·투자자금으로 돈이 활용되지 않는다. 은행은 이제 개인들에게 돈 빌려 주기에 급급한다. 기업이 돈 갚기에 주력하는 것에 비례해 가계대출은 늘어난다. 기업이 수출대금 등으로 빌린 돈을 갚자 개인들은 이 자금으로 집 사기에 열중한다.' 수치로 확인해 보자.2000년 3월말 84조원이었던 은행 가계대출 잔액이 지난달 말 2백5조원이 됐다. 2년반 사이 2.5배 늘었다. 이 기간 중 대기업 대출잔액은 39조원에서 31조원으로 줄었다. 저축금과 직접 비교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올 2·4분기 개인들이 은행에서 빌린 돈은 25조5천억원,저축금은 24조1천억원이다. 1조4천억원의 '자금부족'이 발생했다. 가계의 지출 방식도 심상찮다. 현금서비스,카드론,신용판매로 인한 소비가 전체 가계소비의 9.1%에 달했다. 이런 소비는 '외상으로 소 잡아먹기'나 다름 없다. 이 모든 현상은 외환위기 직전 부실한 대기업들이 보여줬던 양태와 너무 닮았다. 당시 기업들도 은행돈만으로 모자라 리스 종합금융 등 빌려주는 데만 있으면 어디로부터든지 돈을 빌렸다. 빌린 돈으로 회사의 집(사옥)을 지었고 수익을 내든 말든 분에 넘치는 지출을 했다. 그 결과 줄줄이 좌초했다. 돈을 급격히 많이 빌린 곳이 결국 탈낸다는 사실은 외환위기때의 교훈이다. 기업들은 이를 피부로 절감했는데 개인들은 그걸 모른 채 과거 부실 기업의 행태를 본받고 있다. 허원순 경제부 정책팀 기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