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어느 은행에서 창립 20주년 기념품으로 준 시계겸용 라디오는 첫보기에 상당히 깔끔했다.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게 다소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산뜻한 외양에 반해 이리저리 작동시켜 봤다. 그러나 FM은 물론 AM조차 지직거리고 제대로 나오지 않는 바람에 결국 라디오는 포기한 채 알람시계로만 사용하게 됐다. 언젠가 다른 은행에서 사은품으로 준 손톱손질 세트 또한 받을 때의 반가운 마음과 달리 제대로 쓰지 못했다. 6조각짜리 화병 형태에 들어 있었는데 화사했지만 속에 든 손톱깎기를 꺼내자면 조각을 모두 펼쳐야 해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장식품으로 놓을 만큼 고급스럽진 않았던 탓에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기념품이나 사은품이란 이처럼 잘못 만들거나 선택하면 기껏 주고도 "고맙다"거나 "잘 쓴다"는 말을 듣지 못할 수 있다. 청와대를 비롯한 많은 곳에서 방문 혹은 창립 기념품으로 건네는 손목시계도 그런 품목 가운데 하나다. 한동안 인기 만점이던 손목시계가 "그저 그런" 물품으로 평가절하된 건 손목시계의 용도가 바뀐 까닭이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패션션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시계란 주인의 감각을 대변한다"고 말했거니와 실제 오늘날 손목시계는 시간파악용이 아니라 패션용으로 여겨진다. 토털패션을 완성하는 액세서리이며 따라서 예전처럼 한번 장만하면 망가져서 못쓸 때까지 사용하는 내구재가 아니라 사치품 혹은 옷과 비슷한 유행품이라는 것이다. 불가리 시계에 이어 한동안 오사마 빈 라덴이 찼던 타이맥스 시계 바람이 분 것도 그런 데 연유하는 셈이다. 때문에 시계전문회사는 물론 유명 패션업체마다 앞다퉈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한 값비싼 예물시계를 내놓는다. 국내의 경우 손목시계는 늘 몸에 지닐 수 있어 반지나 목걸이 등 다른 보석류보다 더 잘 팔린다고도 한다. 비싼 유명브랜드 제품 외에 그때 그때 유행에 맞춘 패션시계도 많다. 가죽밴드 위에 같은 톤이나 보색의 밴드를 덧댄 더블스트랩(2중 밴드)시계나 손목을 여러번 감는 긴 끈달이 시계,오각형이나 육각형 케이스 시계 등 가지가지다. 패션에 특히 민감하지 않은 사람도 여름엔 시원한 금속줄,겨울엔 따뜻한 가죽줄 시계로 바꾼다. 손목시계의 쓰임새가 이처럼 달라졌는데도 청와대 시계는 10여년 전과 비슷한 형태를 "고수하고" 있다. 5공화국 때부터 YS대통령 시절을 거쳐 지금까지 청와대 시계는 한결같이 봉황이 담긴 동그란 모양이다. 국민의 정부 들어서서 케이스 앞면에 있던 대통령의 이름이 빠진 정도가 변화일까. 물론 지금도 "청와대 시계"라는 것 때문에 갖고 싶어하고 차고 다니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기왕이면 시대와 유행에 맞게 좀더 세련된 디자인으로 만들었으면 싶다. "청와대" 마크도 좋지만 그보다 시계 자체가 마음에 쏙 들도록 말이다. 최근 다시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은 골드보다 화이트,동그란 것보다 네모난 것,두툼한 것보다 얇은 게 산뜻하게 보인다. 디자인강국은 말로만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작은 일부터 앞장서 실천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