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lllee@univera.com 선친은 젊은 시절부터 임종 직전까지 28년 동안 일기를 쓰셨다. 그 일기장을 처음 본 것은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선친의 단출한 유품들을 정리하던 날이었다. 때론 실직한 가장의 참담한 심정이,때론 미래에 대한 희망과 포부가 가감없이 실려있는 손때 묻은 일기장을 넘기면서 나는 울었다. 살아생전 아버지는 내게 신화였고 존경스런 삶의 모범이었으나,나는 아버지 세대를 닮고 싶지는 않았다. 한때 내게 있어 기성세대란 모든 구악과 폐단의 대명사였다. 나는 기성세대의 한계에 분노했고 그들 세대와의 대척점에 나를 위치짓고 싶어했다. 선친의 일기장에는 그런 아들조차 대견하고 기껍게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다. 꿈은 장대했으나 언제나 절박한 현실에 밀려 선택의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던 그분 세대에 대해 새삼 연민과 경의가 솟구치는 건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뜻일까. 지난 8월 열린 아시아 차세대 리더 18인에 대한 기념행사장에서도 그랬다. 기념행사장에는 18인을 선정한 심사위원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광복과 전쟁의 혼돈 속에서 근대화의 일익을 담당한 원로로서 젊은 세대에게 주는 격려와 당부의 말씀이 이어졌다. 우리 사회는 엄청난 성장잠재력을 지녔음에도 당신들은 시대상황과 세대적 한계 때문에 미처 그 꽃을 다 피워내지 못했노라고. 당신들이 못다 이룬 이상을 이제는 젊은이들이 담당해주기 바란다고…. 기성세대를 뛰어넘어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건 모든 젊은이들의 사명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세대의 배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대간의 흉금을 터놓는 대화와 조언을 통해 이뤄질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간 우리에겐 그런 대화가 너무 부족했던 게 아닐까. 행사장을 나서며 나는 다시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 분이 비록 완벽한 대안을 내놓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그 나름의 고민과 좌절,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노력의 과정은 내게 훌륭한 교과서가 된다. 과거와 다른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진작에 서로의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우리 안의 벽을 넘어섰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