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자신의 모든 것들이 위험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상황에서 기업가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이럴 땐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겠어요."


지난 2일 오후6시 서울대 1백30동 5백11호 대형강의실.


학생들의 난상토론을 지켜 보던 최태원 SK(주) 회장이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자 필기구를 잡은 수강생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최 회장의 서울대 강의는 벌써 두 학기째.


그가 맡은 기술정책대학원의 '산업기술정책론'은 수강 신청을 선착순으로 받아야 할 정도의 명강의로 자리를 잡았다.



대기업 회장답게 그의 강의는 기업가가 처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설정해 학생들이 직접 고민하고 의사결정을 내리게 하는 '실전형'이다.


그래서 강의의 부제도 '의사결정자의 딜레마(Decision Maker's Dilemma)'다.


이날 강좌도 딸의 혼사를 앞두고 동생이 경영하는 계열사의 부실 심화로 위기에 처한 한 기업가가 논의대상이었다.


학생들은 "돈을 갖고 튀어라" "법정관리를 신청해 시간을 벌자" "동생 회사와 고리를 끊자"는 등 제각기 다른 처방을 내놓았지만 결론은 한결같다.


"최고경영자(CEO)란 정말 힘든 자리"라는 것.


"최악의 상황에 몰린 경우를 가정했다지만 실제 기업을 경영하다보면 언제든 닥칠 수 있는 문젭니다. 주주 채권단 가족 종업원 등 모든 이해 당사자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최대한 합의(채무조정안)를 이끌어내야 하는 거지요."


최 회장이 제시한 모범답안이다.


그는 기업이 딜레마에 빠지는 것은 CEO의 자질과 경영활동을 수행하는 회사조직의 역량, 제도 통념 등 사회환경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CEO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리더십을 "조직을 환경에 따라 적응토록 변화시킬수 있는 능력"으로, 기업의 의사결정과정은 "CEO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과정"으로 규정했다.


CEO는 자금 기술 마케팅 노무 등 기업활동의 모든 분야에 대해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닦아야 할 뿐 아니라 체력 정신자세 언어력 등 개인적인 능력도 함께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저도 다 갖고 있지는 못하죠.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받아들이는 태도로 상황에 정면 대처해 국면을 전환할 모멘텀을 스스로 창출해야 진정한 CEO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강의 내용은 SK그룹의 최근 행보에서 잘 나타난다.


에너지.화학과 정보통신을 양대 주력사업으로 하고 있는 SK는 미래를 향한 변신에 전력을 쏟고 있다.


주력사인 SK(주)는 OK캐쉬백을 통한 마케팅 등 복합주유소로 비즈니스의 개념을 바꿔 가고 있다.


SK텔레콤도 자동차 길안내 등 '카 커머스 사업', 증권사와 연계한 '모바일 트레이딩 사업' 등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있고 SK글로벌도 물류와 온라인을 결합한 '내트럭 사업' 등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최 회장은 조직역량도 강조했다.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할 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와 대안을 검토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효율적인 조직 구성과 구성원의 자질 향상도 중요하지만 과감한 권한이양과 건전한 토론문화도 빠뜨릴 수 없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SK가 미래전략을 각 계열사들이 자체적으로 마련한 뒤 최 회장 등 그룹 수뇌부와 토론을 거쳐 확정하는 과정은 이와 무관치 않다.


최 회장은 특히 "CEO를 리드하고 체크할 수 있는 기업지배구조의 구축이 성공적인 의사결정을 위한 선결조건"이라고 말했다.


CEO로부터 한걸음 물러서 독립적인 입장에서 판단해야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다.


CEO에 버금가는 역량을 겸비한 이사회 기능이 필수적이라는 설명이다.


"IMF 당시 대기업의 실패는 대주주의 전횡을 견제할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그는 "대주주와 전문경영인의 조화로 시너지 효과를 낼 때 장기적인 기업가치가 증대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지난 1998년 3월 전문경영인인 손길승 SK그룹 회장과 대주주인 최태원 SK(주) 회장간 '파트너십 경영' 체제를 구축한 SK는 그동안의 비약적인 성장을 통해 이같은 최 회장의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지난 1997년말 30조원이던 SK그룹의 매출은 지난해 53조원으로 크게 늘었고 당시 2천억원 수준이던 순이익도 상장사 기준으로 지난해 1조3천억원으로 불었다.


"결코 딜레마에 몰려서는 안됩니다. 기업이 망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동안 잘 봐 오지 않았습니까. 형세를 잘 판단하고 미리 대응해 딜레마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꼼수로는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려면 근본적인 경영능력을 길러야지요."


최 회장의 맺음말이다.



정태웅 기자 redae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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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 1960년 서울생

<> 79년 서울 신일고등학교 졸업

<> 83년 고려대 물리학과 졸업

<> 89년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 박사과정 수료

<> 91년 (주)선경(SK상사) 부장

<> 93년 SK아메리카 이사대우

<> 94년 SK상사 이사대우(경영기획실 사업개발팀)

<> 95년 SK상사 이사(경영기획실 사업개발팀장)

<> 96년 SK상사 상무이사, SK(주) 상무이사

<> 97년 SK(주) 대표이사 부사장

<> 98년 SK(주) 대표이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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