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대담하게 나오고 있다. 작년 10월부터 중앙 계획당국의 권한을 축소하고 생산단위의 자율성을 높이는 경제관리 개선 조치가 실시되었다. 올해 7월1일부터는 배급제 폐지를 중심으로 시장적 방향으로 가격개혁 조치가 단행되었다. 9월17일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방북으로 북·일 관계가 타개되며 최대 초점이던 납치 사건을 정면 돌파하는 자세를 보였다. 핵,미사일 문제에서도 미사일 발사시험 무기한 동결,핵 사찰 수용 시사 등 북·미 관계를 개선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움직임의 토대로서 남북 관계의 원상회복이 있으며,북측은 여기서도 경의선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을 비롯 5대 사업을 전면 이행하고 있다. 숨가뿐 흐름 속에서 다시 큰 수가 두어지고 있다. 신의주특별행정구법안 발표와 함께 신의주 개발 계획의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입법 행정 사법의 자율권,50년의 토지임대권 등 제도 면에서 중국의 홍콩식 '일국양제(一國兩制)'까지 담을 수 있는 폭을 갖고 있다. 책임자인 행정장관도 네덜란드 국적인 중국인 대기업가가 내정되는 '파격'이다. 이것만 보아도 북한이 벤치마크를 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중국의 홍콩 행정특별구와 선전의 경제특구를 능가하는 내용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작년 1월 상하이 푸둥지구를 방문하고 '천지가 개벽했다'며 중국의 개혁 개방을 높이 평가하는 발언을 한 것이 빈말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 직후 그가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고 새로운 사고를 외친 이면에 이러한 계획이 준비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외부 세계는 북한의 변화를 과거처럼 '개혁 없는 개방'이 아니라 '개혁·개방'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신의주특구는 그 개방도 중국수준을 지향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물론 이러한 북한의 조치가 바로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 나진·선봉지대 구상과 달리 해외자본을 실제로 유치해 내는 실적을 올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외국자본이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사회 인프라 건설이 확충되어야 한다. 외국투자가들이 좀더 안심할 수 있는 후속적인 제도 정비도 뒤따라야 한다. 하지만 개혁은 의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혁이 성공을 거두려면 능력과 여건도 따라주어야 한다. 이번 신의주특구처럼 대담한 시도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중국이란 배후지가 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북한이 처한 현실에서 볼 때 중국 시장경제와의 연관 효과 뿐 아니라,중국정부의 정책적 경제적 지원 없이 일국양제까지 내다보는 실험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외부로부터의 협력과 지원이 개혁·개방에는 불가결한 것이다. 경의선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도 남북 관계 뿐 아니라 러시아의 협력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사업이다. 1년 전부터 북·일 수교를 위한 물밑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일본의 참가와 지원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철도 재건에 들어갈 막대한 재원을 고려할 때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을 제외하고 이를 감당할 수는 없다. 여건 조성에서 역시 중요한 과제는 미국이 북한의 변화를 제대로 평가해 주도록 설득해 내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 정부가 베를린 선언을 통해 남북 경제공동체를 기치로 대북 전력,인프라 건설 지원을 얘기한 지 2년반이 지나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도 감격 속에 개최됐고,남북 관계는 기복 속에서도 진전되고 있지만 이 선언은 아직 실천되지 못했다. 이미 92년 한·중 수교로 황해경제권이 열리며 남한에는 서해안 시대가 개막된 바 있다. 북·일 수교가 매듭지어지면 환동해 경제권이 형성되며 동해안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한반도의 지도가 바뀌며 이어진 철길을 따라 남북 경제공동체로 한발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남북 관계는 중국 러시아 일본(가능하면 미국도)이 서로 얽힌 동북아시아 지역의 틀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북한의 개혁·개방 움직임에 역할을 못하면서 남한이 새로운 질서를 선도해 갈 수는 없다.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사고를 가지고 대북 경협에 임해야 할 때이다. suhdm12@chol.com -------------------------------------------------------------- ◇이 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