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태어나서 3번 운다고 했다. 태어날 때,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그리고 나라를 빼앗겼을 때라던가. 하지만 나는 젊은 시절 사회 생활을 하면서 한 차례 굵은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대학졸업 후 단자회사에 다니던 시절,대신증권 인수에 실무책임자로 참여한 뒤 다음해 대신증권 사장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근무 이틀째,오후 장이 마감되자 우리 회사 시장대리인 한명이 찾아왔다. 그는 "주식 1만주를 오전에 사서 오후에 되팔아 주당 1백원씩 남았다"며 "이 주식을 받으라"고 제안했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다. 알고 보니 1백만원을 뇌물로 주겠다는 얘기였다. 어이가 없었다. 당시는 주식 거래가 수작업으로 이뤄지던 시대였다. 매수 주문과 매도 주문을 들어온 순서대로 연결하는 게 아니라 시장대리인이 멋대로 거래를 체결시킬 수 있었다. 당장 지점 거래를 모두 본점으로 모아 순서대로 거래를 체결토록 지시했다. 그랬더니 통틀어 3명이던 회사 시장대리인들이 모두 사표를 던지는 게 아닌가. 결국 회사는 하룻동안 문을 닫고 거래를 못했다. 난리가 났다. 비난의 화살이 모두 나에게 돌아왔다. '내가 잘못한 게 뭐란 말인가.' 그날 너무 억울하고 속상해 눈물을 쏟았다. 다음날 부랴부랴 다른 회사에 다니던 시장대리인을 물색했다. 그들도 선뜻 우리 회사로 오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삼고초려 끝에 그들을 데려와 정상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오기가 생겼다. '시장대리인 제도를 깨자.' 당시 시장대리인들의 모임인 시장대리인회는 상업고등학교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결속력도 대단했다. 1년에 한 회사당 2∼3명 밖에 응시기회가 없었고 시장부 근무자가 아니면 이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중세의 도제제도와 같았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생각도 들었다. 고심 끝에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대졸 공채 출신을 시장대리인 교육을 시켜 자격증을 따도록 하는 것이었다. 시장대리인회와의 지루한 싸움 끝에 2년 뒤부터 시장대리인 시험에 대졸 출신도 응시할 수 있게 됐다. 응시숫자에 대한 제한도 없어졌다. 대졸 출신들이 늘어나면서 결국 시장대리인회는 문을 닫았다. 시장대리인들과의 대립은 결과적으로 제도 개선의 계기가 됐지만 그 날 흘린 눈물은 지금 생각해도 쑥스럽기만 하다. 정리=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