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사회의 가장 큰 폐단 중 하나는 환곡(還穀)이었다. 환곡은 원래 춘궁기에 국가가 농민에게 빌려줬다 추수 후 되받는 구빈구휼 제도였으나 18세기말 부세(賦稅)성격으로 바뀌고 19세기엔 고리대로 변질됐다. 다산 정약용은 '환곡이 늑탈(勒奪)이지 어찌 부세라 할 수 있는가'라고 통탄했다. 환곡 못지 않게 심각했던 게 송정(松政)이었다. 조선조에선 궁궐 건축과 배 건조 등을 위해 공산(公山)은 물론 개인산이라도 소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하는 송금(松禁)정책을 폈는데 이의 부작용이 극심했던 것이다. 이 송정의 폐해를 지적하고 해결책을 제시한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1758∼1816)의 '송정사의'(松政私議·소나무정책에 대한 개인의견)가 발견됐다는 소식이다. 다산의 형으로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를 편찬한 손암이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자산어보(玆山魚譜)'와 함께 펴낸 '송정사의'(1804)는 그동안 제목만 전해졌을 뿐인데 최근 고교교사 이태원씨가 개인문집 '운곡잡저'에 필사돼 있는 걸 찾아냈다는 것이다. '송정사의'에 따르면 소나무가 얼마나 귀했는지 관재(棺材) 하나 값이 4백∼5백냥에 달하고,그나마 시골에선 구하기 어려워 부자가 상을 당해도 시신을 관에 넣는데 열흘이 걸리고,평민 태반은 초장(草葬)을 했다고 한다. 손암은 이 모든 게 공자나 안연이라고 해도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잘못된 소나무 벌채금지법에 있다며 법을 바꿔 개인산이건 나라산이건 소나무를 심게 해 포상하고 민둥산에 숲을 이뤄놓은 마을엔 일정 기간동안 세금을 면제해 주는 식목 장려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암은 또 나무가 없으면 배와 도구를 만들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물고기와 소금을 구하지 못하는 건 물론 농사와 공업도 어려워진다며 자칫 백성과 국가의 숨이 끊어질 지경이라고 호소했다. 아울러 신뢰를 얻지 못하는 명령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경우는 없었다며 시대변화에 따라 적합한 법을 제정할 것을 제언했다. 규제나 금지로 어떤 일을 막을 수 없는 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