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내은행들의 러시아 경협차관 15억9천만달러(약 1조9천억원)에 대한 지급보증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겠다고 밝혔다. 지급보증을 한 이상 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러시아가 채무재조정을 요구하는 등 차관상환을 미루고 있다고 해서 정부가 지급보증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좋다는 논리는 절대로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부에서 하루빨리 러시아 경협차관을 대(代)지급해야 한다고 이미 여러차례 주장해 왔다. 이 문제는 우리 금융의 고질인 관치금융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성질의 것이다. 정부가 은행빚을 갚기 싫으면 갚지 않아도 되는 풍토라면 시장경제니 '규칙있는 경기'니 하는 소리는 말짱 공염불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점에서 국채를 발행해 이를 갚기로 했다는 재경부 발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내용을 좀 더 뜯어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대지급을 위한 국채를 발행할 수 있도록 내년에 공공자금관리기본법을 개정키로 하고 채권은행단과 보증채무 이행기간을 내년 9월로 1년 연장하겠다는 재경부 발표는 냉정히 말해 상환의무 이행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미 8년동안이나 부당하게 미뤄온 대지급 의무를 그런 명분으로 또 1년 미루려는 것이라고 본다면 지나친가? 그러나 그동안의 과정을 되새기면 꼭 내년에는 상환될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너무 많다. 재정사정 때문에 내년 예산안에 상환재원을 반영할 수는 없고 내년 상반기에 공공자금관리기본법을 개정해 국채를 발행해 갚도록 하겠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다. 새해 예산안에 국채발행과 보증채무이행재원을 동시에 반영하는 것과,내년 상반기 법개정을 거쳐 국채를 발행하겠다는 것은 재정운용 차원에서 실질적인 차이가 전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왜 전자의 방법을 택하지 않고 복잡하기만 한 후자쪽을 택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겉으로나마 균형재정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 얕은 꾀를 부린 것이라면 국민에게 정직하고 솔직하지 못한 짓이라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고,눈앞에 닥친 대지급 의무를 어쨌든 미루고 보자는 의도라면 행정편의적 금융관치를 또 되풀이하는 것이란 점에서 역시 지탄받을 일이다. 정부도 보증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나라,그런 나라 금융 메커니즘을 밖에서 어떻게 볼지,그러고도 국내은행에 대한 대외신인도가 높아지기를 기대할 수 있는지,관계당국자들은 생각하는 점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