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忘却)의 사전적 뜻은 '경험했거나 학습한 내용의 인상이 사라져 그 기억을 되살리기 어렵게 된 상태'다. 분명 겪고 알던 것이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인 셈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망각은 축복이다. 증오나 원한, 괴롭고 슬픈 일을 잊지 못하면 살아가기 어렵다. 망각이 있어 자식을 잃는 끔찍한 고통도 견디는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우리는 모든 기억을 너무 빨리 지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온국민이 통탄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금방 까맣게 잊는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같은 대형참사는 물론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던 외환위기를 겪고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이다. 한국사람들은 모두 살아서 레테(Lethe·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망각의 강.죽은 자는 이 강물을 마시고 이승의 기억을 잊는다고 한다)를 건넜다고 할 정도다. 삼성경제연구소가 '학습국가를 위한 실천과제'라는 보고서에서 다시 우리의 이런 '국가적 망각증'을 지적했다. 정치 경제 사회 전 부문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대책을 세우는 듯하다 형편이 좀 나아지면 금방 잊고 만족하는 'CRIC(위기-대응-호전-만족)'를 반복, 같은 실패를 되풀이한다는 진단이다. 망각증이 우리의 고질이라는 건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오죽하면 '두고 보자는 사람 안무섭다'고 할까. 뼈아픈 일이 재발되지 않게 하려면 아픈 기억을 쉽게 버리지 말아야 한다. 미국의 경우 9·11사태 이후 대학 신입생에게 코란을 읽히고, 뉴욕타임스는 매주 '슬픔의 초상'이란 희생자 스토리를 싣는다. 참사를 기억, 교훈으로 삼자는 의도다. '지난 일'이라며 용서하면 안될 것까지 너무 쉽게 용서하고 '나쁜 기억은 빨리 잊는 게 상책'이라는 식의 자기위안만 계속하면 어떤 잘못도 고쳐질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른 게 아니라 과거의 현재,현재의 현재,미래의 현재가 있다"고 말했다. 최고의 예언자는 과거라고도 한다. 망각의 늪에 빠지면 과거가 없고,과거가 없으면 반성이 없고,반성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