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醫.齒.韓(의대 치의대 한의대)'을 겨냥해 이공계를 뛰쳐 나오는 학생들도 줄을 잇고 있다. 서울대 이공계 대학원에서는 입학 정원에 미달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정부 출연연구소도 몸살을 앓기는 마찬가지다. 연구원들은 "자식만은 이공계로 진출시키지 않겠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한국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이공계가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은 29일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이공계를 살리자'라는 주제로 제20회 밀레니엄 포럼을 열었다. 이날 토론내용을 간추려 싣는다. ◆ 신용인 안진회계법인 대표 해마다 자연계에 응시하는 고3 수험생들이 줄어들고 있다. 최근에는 그 비율이 26.9%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왜 이공계 기피현상이 요즘 들어 더욱 두드러지는 걸까. 우선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기업이나 연구소들이 연구인력을 1차 감원대상으로 삼고 연구개발비용을 축소한 것이 한 원인이다. 또 사회적 보수나 근무조건 지위 등이 열악하다는 점도 이공계 기피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과학기술부가 발표한 이공계 사기진작책은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삼성이 5천억원의 장학금을 조성한다는 얘기도 긍정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아직 과학영재를 육성하는 데는 미흡한 점이 많다. 영재교육진흥법이 올해부터 실시되긴 했지만 제대로 된 성과를 낼지는 아직 미지수다. 서울시가 입시과열을 우려해 영재학교 지정을 기피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과학영재들이 대학에 특례입학할 수 없다는 것도 문제다. ◆ 이승구 과학기술부 차관 이공계 기피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 그 정도가 급격히 심화돼 문제가 되고 있다. 정부에서도 이같은 점을 우려, 여러 가지 방안을 추진중이다. 하지만 정부의 노력만으론 이공계를 활성화시킬 수 없다. 사회 전반에서 정부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예전보다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연구개발 비용만 봐도 이젠 정부부문의 비중이 전체의 25%밖에 안된다. 기업 언론 등 사회 전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한 시스템적인 접근도 필요하다. 왜 이공계 진학을 꺼리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이 선행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청소년들이 이공계를 장래 희망으로 선택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현재 우리의 환경은 이런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사회의 지도층이 대부분 문과 출신들로 구성돼 있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어려운 이과공부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진 못한다. 청소년들이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이공계 출신 인사가 많이 배출돼야 하고 이를 도울 수 있는 중장기적인 대책이 수립돼야 한다. ◆ 한민구 서울대 공대 학장 대개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1만달러를 넘어서면 이공계 기피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회가 풍요로워지면 구직에 대한 공포가 줄어들게 되고 이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과정을 거치는 과학기술 분야 진출을 꺼리게 만든다. 그러나 단순히 과학기술인력의 감소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공계 출신이 법조계에 진출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하다. 그보다는 학생들을 이공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우리 사회에는 어느 정도의 과학기술인력이 필요한 건지, 소수의 과학영재 육성과 보편적인 산업인력 양성이라는 두 가지 목표 가운데 어느것에 힘을 실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컨센서스가 없다는 얘기다. 대학이 평준화라는 큰 틀 속에 갇혀 있다는 것도 문제다. 대학에 학생 선발권이 부여되지 않은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획일적인 대입 위주 공부로는 이공계 인력이 경쟁력을 갖기 어렵고 이는 이공계의 전반적인 침체로 이어진다. 과학영재에 대입특례를 부여하고 이공계 인력들에 대한 보상체계를 확립하는 등의 현실적인 유인책도 반드시 고려해야 할 대상이다. ◆ 이계안 현대캐피탈 대표이사 회장 예전 현대자동차에 있을 때 기아자동차를 인수하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현대자동차보다 기아자동차의 연구인력이 더 우수했기 때문이다.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현대자동차의 연구인력이 뒤떨어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 원인이 궁금했다. 문제는 단순한데 있었다. 기아자동차 연구소는 서울과 가까운 소하리에 있었던 데 비해 현대자동차 연구소는 울산에 둥지를 틀어 이공계 인력들이 오기를 꺼렸다는 것이다. 가족과 떨어져 있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울산에 주택을 마련해 주기도 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서울의 부동산 가격이 오르면서 울산과의 격차가 벌어지자 연구원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서울에서 버틴 사람들은 상당한 자산을 보유하게 된 반면 울산에 내려온 연구원들의 재산은 제자리걸음을 했다. 문화나 교육 측면에서도 지방은 기피대상으로 지목됐다. 그래서 결국 서울 강남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곳에 연구소를 마련하게 됐는데 이런 경험은 최근 들어 불거지고 있는 이공계 기피현상을 설명하는 데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 김시중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프랑스의 한 학자는 과학기술을 육성해야 하는 이유로 △국가안보 △국민건강 증진 △일자리 창출 △높은 생활수준 △국가 문화 창달 등 5가지를 꼽았다. 하지만 국내 지도층 인사 가운데는 이런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학기술에 그동안 투자를 많이 했는데 나아진게 뭐냐, 차라리 외국에서 기술을 사들여 오는게 낫지 않느냐"는 한 정부관료의 말을 들었을 땐 허탈함을 감추기 힘들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공계 기피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사회 전반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라 생각한다. 정치권이나 정부부처를 포함해 사회 전분야의 인식 개혁이 필요하다. 어느 신문의 1면에서도 과학 관련 기사를 찾아보기 힘든 현실에서는 청소년들이 이공계를 장래희망으로 정하기 힘들다. 이와 함께 이번 대선에서 과학기술자가 직능대표 국회의원으로 배정될 수 있도록 여론을 조성할 생각이다. 특별취재팀 strong-kore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