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연구단지 한가운데 자리잡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12개 연구동은 새벽까지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 통신반도체 컴퓨터 인터넷 등 한국IT(정보기술) 산업을 일궈낸 핵심기술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나왔다. 석.박사급 고급 연구원만도 1천7백22명에 이른다. 이공계 분야 국내 최대,최고 국책연구기관으로 손색이 없다. ETRI는 지난 25년간 엄청난 연구성과를 쏟아냈다. 그동안 개발한 기술은 상용화된 것만도 1만여건을 넘는다. ETRI가 국책과제로 개발한 신산업분야 주요기술을 시장가치로 따지면 무려 1백68조원에 이른다는게 자체 분석 결과다. TDX(전자교환기) 상용화로 5조3천8백억원, 초고집적 D램반도체 개발로 1백7조8천억원,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기술개발로 51조3천억원 등의 시장 유발효과를 냈다. ETRI는 미국 퀄컴사와의 10여년간에 걸친 소송 끝에 1억달러의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기술료를 환급받았다. 이는 외국으로부터 받은 기술료 가운데 최대로 퀄컴사에 승소한 ETRI 사례는 '국산 기술력의 승리'로 평가받았다. ETRI는 이번 승소로 이미 받은 1억달러 외에 2008년까지 1억2천만달러를 추가로 지급받게 됐다. 이같은 ETRI도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 이후 몰아닥친 지난 98년의 출연연구원 구조조정 한파를 벗어나지 못했다. 98년부터 3년 동안 전체 연구원의 절반이상인 9백여명이 연구실을 떠났다. 연구시스템도 제 기능을 찾지 못했다. 최대위기를 맞은 것이다. 왜 이렇게 됐는가. 연구개발능력의 한계를 우선 꼽을 수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ETRI가 허약한 체질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는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ETRI는 오랫동안 민간 통신기업들과 호흡을 같이해 왔다. 상용화에 필요한 응용기술을 개발, 기업에 이전하는데 힘을 쏟아 왔다. 그러나 이같은 역할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ETRI와 함께 10여년간을 연구개발해온 통신업체의 한 관계자는 "기업보다 앞서가는 선행연구가 부족하다"고 진단한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는 "ETRI에서 진행하고 있는 연구과제의 90% 이상이 외국에서는 이미 결과물(Output)까지 나온 것"이라고 꼬집었다. 실제 ETRI가 지난 몇 년간 해온 연구과제의 대부분은 단기과제였다. 이들 과제는 당장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주류였다. IMF 관리체제 이후 연구자금확보를 위한 일시적 방편이었다. 이로 인해 일부에서는 "기초연구에 몰두해야 할 ETRI가 돈을 벌기 위해 기업과 경쟁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ETRI가 국내 최고 연구기관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연구시스템을 수술하는 등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재원구조를 바꾸는 것도 필요하다. ETRI의 연간 예산은 3천5백85억원(2002년 기준). 이 가운데 정부 출연금은 1백33억원으로 3.7%에 그치고 있다. 나머지는 정보화촉진기금으로 지원되는 국책사업비에다 민간기업에서 프로젝트를 따내 얻은 응용연구 사업비다. ETRI 관계자는 "다른 출연연구기관들은 정부 출연금 비율이 평균 50% 이상인데 ETRI만 턱없이 낮다"며 "안정적인 연구수행을 위해 출연금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외부에서의 시각은 다르다. ETRI는 이미 연구예산의 절반 이상을 정보화촉진기금으로 충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갈수록 바닥나는 정보화촉진기금을 대체할 연구비를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있다는게 한 연구원의 지적이다. 기초연구 투자도 늘려야 한다. 현재 ETRI의 연간 연구예산중 기초연구비 비중은 13%에 불과하다. 미국 AT&T연구소나 일본 NTT연구소 등의 30∼40%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 따라서 선행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선 기초연구비 비중이 20%는 돼야 한다는 것이다. PBS(프로젝트베이스시스템) 제도도 개선돼야 한다. ETRI는 '스스로 벌어서 사는 연구원', '1인당 기술료 세계 최고를 실현하는 연구기관'을 모토로 출연연구기관으로는 PBS 제도를 가장 먼저 도입, 실시해 왔다. ETRI가 'IT 기술의 산실'이 된 데는 이같은 성과주의 제도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외부에서 따오는 연구비가 전체의 98%를 차지해서는 세계적 연구소로 도약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래기술을 남보다 앞서 발굴, 초기 투자하는 모험정신도 필요하다. 세계 인터넷 환경을 뒤바꾼 DSL(디지털가입자망) 기술은 ETRI가 초기투자에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ETRI는 단기사업에만 치중한 결과 DSL 기술확보 타이밍을 놓치고 DSL이 외국에서 이미 뜨기 시작할 때 뛰어드는 실수를 했다. ETRI는 DSL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지난해 미래기반기술 분야 5대 대형과제를 선정, 투자에 나서고 있다. △4세대 이동통신 기술 △차세대인터넷 서버기술 △차세대 능동형 네트워크시스템 △초고속 광가입자망기술 △지능형 통합정보방송(스마트TV) 기술 개발 등이 그것이다. TDX와 CDMA에 이을 세계적 연구성과물을 과연 몇 개나 내놓을 수 있을까. ETRI의 미래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 특별취재팀 strong-kore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