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묘한 역설을 뱉어낸다. 여행자는 타인의 삶과 다른 사회가 궁금해서 낯선 곳에 갔겠으나,종국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이번 노르웨이 여행이 끝날 즈음에도 내 머릿속에는 우리의 자화상에 대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어떤 옷이 맞을까?' 노르웨이는 낮이 지속되는 백야와,밤이 지속되는 흑야가 있다. 일조량이 충분한 기간이 극히 짧아,식물들은 3∼4개월 내에 성장과 번식을 마쳐야 한다. 한꺼번에 피어나 펼쳐진 광활한 꽃벌판도 기간 내에 일생을 끝내려는 서두름의 징표다. 봄부터 가을까지 적절한 시간을 골라 교대로 꽃피우고 열매맺는 우리 식물들보다 삶의 사이클이 고달프다. 긴 시간 밤과 혹한을 견뎌야했던 서민들의 가난과 배고픔도 어렵지 않게 연상된다. 이들이 설화 속에 만들어낸 착한 '트롤(도깨비)'들은 부자들의 식량을 가져다 가난한 이들의 집에 던져준다. 착한 이를 골라 횡재를 안겨주던 우리의 도깨비들과는 역할이 사뭇 다르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착한 트롤의 재분배 행위를 통해 넘어가고 싶었던 노르웨이인들의 판타지이다. 바이킹족들도 한밑천 잡아보려는 도적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들은 보석이나 돈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해적질이라는 것이 '식량을 훔쳐서 굶주림을 달래고,여자를 약탈해 종족을 유지해나가려는 극한의 생존투쟁'이었다. 거창한 이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이들이 삶의 가혹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사회주의형 복지국가 건설이 아니었을까? 생육의 숨소리조차 멎는 혹한과 암흑 속에서 헐벗지 않기 위해서는 착한 트롤이 필요했을 것이다. 부자의 식량과 땔감을 서민들의 뒤뜰에 던져놓고 가는 트롤말이다. 국가는 국민들과 대타협을 해 착한 트롤의 역할을 떠맡았다. 국가는 두려운 미래를 태워버렸다. 고율의 누진세를 걷고,그것을 재분배한다. 토지를 국유화하고,누구에게나 토지사용권을 준다. 고용을 보장하고,어려울 때면 삶의 안전지대로 피신시켜 준다. 그래서 국민들은 미래를 대비할 필요가 없다. 대비할 수도 없다. 은행의 저금조차 고율의 세금을 매겨서,미래보장비로 편입시키니까. 노르웨이는 마침내 1백% 순수하게 현재를 즐기는 기적을 현실화했다. 월급을 마음껏 쓰다가,다음 월급받기 전의 마지막 주에는 돈없이 즐기는 삶으로 간다. 호주머니가 빈 집들은 (열보존을 위해) 풀로 덮은 지붕위로 가족야유회를 가기도 한다. 지붕에 올라앉은 아이들은 신이 나서 익은 블루베리 열매를 딴다. 엄마는 가져온 설탕시럽에 블루베리를 비벼서 쨈을 만든다. 빵에 발라 먹으며,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든다. 미래보다 값나가는 현재의 축복을 누리는 그들만이 간직할 수 있는 천진함이다. 보장된 미래를 갖고 있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걱정없는 현재'를 목격하며,깊은 상념에 잠겨 갔다. 우리들의 민간설화에 나온 좋은 도깨비는 무엇을 했던가? 그들은 주로 권선징악을 담당하는 해결사였다. 이야기 말미에 등장한 도깨비들은 악한 이를 벌주고,착한 이를 상주었다. 노르웨이 서민들의 뇌리 속에 굶주림과 추위가 박혀 있었다면,우리네 서민들에게는 억울함이 자리잡았었나 보다. 우리 선조들은 힘있는 자들이 저지르는 횡포를 막을 힘을 염원하면서,'해결사' 도깨비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오늘날의 서민들도 여전히 해결사 도깨비를 기다리고 있다. 힘있는 사람끼리 야합했다는 각종 게이트,병역부정,조세포탈 등… 신문지상에는 권력자들이 게임의 규칙을 어기고 특혜를 누린 기사들로 가득하다. 사회의 규범대로 했다면,결코 자신들의 몫이 될 수 없었던 돈 지위 시간 학벌 등을 챙긴 권력자들의 이야기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착한 트롤을 현실화했듯이,우리도 이제는 정의의 도깨비를 제도화해야 한다. 나쁜 사람들의 부당한 힘을 무력화시키고 벌주는 도깨비, 착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한(恨)을 달래주고 인생을 보상해주는 도깨비를 현실로 불러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득권자들이 힘을 오남용하는 것을 막고,억울한 서민들을 구제해주는 사회통제장치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그 날이 오면 서민들도 한이 없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천진함을 되돌려 받을 것이다. lmn@snu.ac.kr